일을 줄이자. 삶을 되찾자.

Posted by on Apr 25, 2019 in 단상, 일상, 집필 | No Comments

일을 효율적으로, 더 많이 해내는 데 대한 이야기는 많은데 사회 전체가 일을 줄여야 할 필요에 대한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적은 것 같다. 사실 일을 줄이면 잘할 수 있을 확률이 엄청나게 높아지는데.

교육개혁도 마찬가지다. 더 많이 측정하고, 더 많이 평가하고, 더 ‘잘’ 줄세우면 학력수준이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학생과 교사에게 그 어떤 조건도 없는 시간을 주면 문제의 상당부분은 자연스레 풀린다.

시대가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닦고 조이고 기름치고 더 빡세게 돌리자’는 마인드는 여전히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대개의 경우 복잡한 메커니즘 통해 개혁하려 하기 보다는 성원들에게 시공간을 돌려주는 게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학습과 발달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다.

덧. 이 글의 모티프가 된 소로의 말 둘. (from 기쁨샘)

“일의 노예가 되는 것은 옳지 않다. 인간의 육신은 곧 토양으로 섞여 들어가 퇴비로 변한다.”

“우리가 잠시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 가능하겠는가?”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스쳐 지나가는

Posted by on Apr 24, 2019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신대방동 살 때이니 꽤 오래 전 일이다.

퇴근할 때 늘 마주치는 사람이 있었다. 서너 살 위쯤 되어 보이는, 변함없이 셔츠와 청바지를 사랑하는, 뿔테 안경이 제법 잘 어울리는 남성이었다.

주로 지하철역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마주쳤지만 공원 산책 중에도 여러 번을 스쳤다. 그는 늘 같은 자세로 날렵하게 생긴 자전거를 끌고 있었고 가끔은 담배를 피웠다.

그렇게 마주치길 어언 4-5년.

그날은 우연히도 집앞 독서실에서 그와 마주쳤다. 자전거를 세우고 공부하러 들어가려는 것 같았다. 반가운 마음에 용기를 내었다.

“안녕하세요? 이 독서실 다니시나 봐요.”
“누구시죠?”
“아… 저 이 동네에서 자주 뵈었는데요…”
“저는 뵌 기억이 전혀 없는데…”
“…..”

어색한 침묵과 함께 나는 그를 만난 적이 없는 것이 되었다. 나는 그를 수없이 스쳐갔지만 그는 나를 단 한번도 스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와 말을 섞는 경험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가끔은 타임라인에 올라오는 숱한 사람들의 관계가 그 남성과 나의 관계 아닐까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또 나에게 그런 느낌을 갖고 있을 것이다.

허무하다거나 부질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말 한번 섞을 만한 ‘임계치’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만남이란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생각해 본다.

기능어의 분포

언어에서 빈도수 최상위를 차지하는 단어들은 대개 기능어(function words)이다. 영어의 경우 대표적인 기능어로는 관사, 접속사, 대명사, 조동사, 전치사 등이 있다. 참고로 초기 영국 말뭉치 언어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British National Corpus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the, of, and, to, a, in, that, it, is, was 순이다. (좀더 세심한 데이터 작업을 거치면 is와 was가 다른 be동사형과 함께 하나로 묶여야 하지만 그 경우에도 10위는 대명사인 “I” 몫이다.)

대규모 말뭉치의 경우 하위 말뭉치의 장르에 따라 이들의 분포가 사뭇 달라진다. 일례로 롱맨 코퍼스의 경우 대화문 말뭉치에서는 대명사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학술적인 글에서는 전치사와 관사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

이러한 차이는 학술적인 글과 면대면 대화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얼굴을 맞대고 하는 대화에서는 많은 정보들이 공유된 채 대화가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명사가 계속 새로 등장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특정한 대상을 대명사로 지칭하는 빈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학술적인 글에서는 ‘글’의 특성상 정보가 공유된 채로 담화가 흘러가지 않는다. 개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기에 명사가 자주 사용되는 것이다. 아울러 많은 정보들이 명사구로 표현된다. 따라서 명사와 짝을 이루는 관사의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다.

나아가 전치사가 포함된 복합명사구(e.g. the adaptation of the method within a new context)의 쓰임이 면대면 대화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따라서 전치사의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

참고로 wordcount.org를 기준으로 가장 빈도가 높은 일반명사는 time(66위)이고 그 다음은 people (81위)이다. <어머니와 나>에서도 언급했듯 빈도수만으로 볼 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과 사람인 셈인데, 그저 우연으로 보기에는 가볍지 않은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하다.

#데이터와영어교육

외국어로 대화하기

Posted by on Apr 23,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동네가 떠나갈 듯 큰 소리로 대화하며 지나가는 여중생 다섯. 한국어가 아닌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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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까삐까.”
“삐까삐~까.”
“삐삐까삐~삐까.”
“삐까삐까삐까삐까삐~까.”
“ㅋㅋㅎㅎㅎ%#$#@!ㅌㅌㅋㅋ”

그들은 오로지 “삐까삐까”로만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끼고싶었지만참았
#삶을위한피카츄어공부

접힘과 펼침, 고유명사에서 보통명사로

책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종종 검색을 한다. 지식의 전달만큼이나 함께 실천하는 ‘친구’를 얻는 게 목적이었던만큼 책을 매개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단단한영어공부 로 검색을 했다. 새로운 포스트가 보였다. 그런데 클릭을 해보니 <단단한 영어공부>와 관련된 이미지가 아니었다. 전혀 다른 책 이야기를 하는 포스트에 #단단한영어공부 그리고 #삶을위한영어공부 태그가 달려 있었던 것이다.

살펴보니 포스트를 올리신 분은 일전에 <단단한 영어공부>를 읽으신 독자셨다. 책을 읽고 이 표현들이 맘에 드셨는지 다른 영어공부 포스트에 이 두 표현을 태그로 사용하신 것!

적어도 이 분에게 #단단한영어공부 와 #삶을위한영어공부 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가 되었다. 내 책 이야기가 아니어서 순간 실망했지만 이내 마음이 따스해졌다.

어쩌면 책을 쓴 이유는 이들 표현들이 특정한 책의 제목이나 부제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에 흘러든 ‘보통 표현’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나의 책 제목 따위는 잊혀지지만 누군가의 실천의 양태가 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단단한 영어공부>나 <삶을 위한 영어공부>도 수많은 이들의 실천과 생각으로 빚어진 책이다. 수많은 보통명사의 앙상블이 만들어 낸 일시적인 고유명사일 뿐.

책의 제목은 고유명사로 남지만 궁극적으로 삶의 곳곳에 스며든 보통명사로, 또 실천으로 변화한다. 이들은 다시 누군가의 손에서 고유명사로 빚어진다. 이렇게 보통명사와 고유명사는 접힘과 펼침을 거치며 세상을 유랑한다.

#삶을위한영어공부 #단단한영어공부

인지언어학 이야기 49 – 관사 (1)

Posted by on Apr 22, 2019 in 수업자료, 인지언어학, 집필 | No Comments

문법 새롭게 보기 – 인지문법의 세계 (3)

“Everything should be as simple as it can be but not simpler!” (모든 것은 가능한 한 단순하게 만들어야 하지만 (실제보다) 더 단순하면 안된다!)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아인슈타인이 했다고 전해지는 말입니다. 저는 이 인용구를 볼 때마다 문법, 그 중에서도 관사에 대한 흔한 설명방식 중 하나를 떠올립니다.

처음 나오면 a, 그 다음 나오면 the (?)

중학교 때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문법책에서 관사를 처음 접한 저는 복잡한 규칙들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손을 들고 질문을 했죠.

“선생님, a랑 the랑 언제 써야 하는지 헷갈리는데요.”“그거 많이 헷갈리지. 근데 이것만 기억해. 뭔가를 처음 쓰면 a고 그 다음에 받을 때는 the로 받는 거야. 그러니까 바나나를 처음 말할 때는 a를 쓰고 그 다음에 그걸 다시 받으면 the를 쓰면 되지. 쉽지?”“아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사실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는 했지만 선생님의 답변이 만족스럽진 않았습니다. 문법책을 봤을 때 선생님의 설명과 벗어나는 예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천체를 나타내는 the moon, the universe, the sun 등의 표현입니다. 이들은 처음 언급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관계없이 ‘the’와 함께 쓰입니다. 이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는 정관사 the와 부정관사 a의 어원과 이에서 파생한 개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a와 the의 어원, 그리고 개념적 특성

영어사를 살피면 부정관사 a/an이 ‘하나’를 나타내는 말 one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의 …”는 “다수의 …”를 상정하고 (즉, an apple은 multiple apples가 있음을 전제하고), 이 다수가 이루는 집단(group)의 한 개체임을 표시합니다. 따라서 a/an의 경우 셀 수 있는 명사 앞에 나오게 되지요.

이에 비해 정관사 the의 주요 역할은 명사를 특정(to specify)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어원을 살핌으로써 그 의미를 보다 상세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The의 어원을 따라 올라가면 고대영어의 중성 지시어 þæt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은 정관사 the 뿐만 아니라 지시대명사 that으로도 진화합니다. 의미상 정관사 “the”는 ‘저것’을 나타내는 말에서 왔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정한다’ 함은 ‘콕 짚어서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화자가 사용하는 명사가 청자에게도 알려져 있어야 합니다. 청자가 모르는 명사를 콕 집어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까요.

우리가 ‘저 책 좀 줘봐.’이라고 말할 때에는 ‘저’가 가리키는 것이 청자가 특정할 있는 물리적 영역에 있습니다. 말하는 이는 ‘저’라는 말을 청자가 이해할 수 있다고 가정하지요. 이같은 지시의 역할이 인식의 영역에 적용된 것이 바로 정관사 ‘the’가 하는 기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자가 “the”를 붙여 말하는 명사는 청자의 인식 속에서도 특정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원리에 따르면 sun이나 moon 나아가 universe 등 천체를 나타내는 말은 언제 쓰이건 대화자 모두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해는 유일한 해이고 달은 유일한 달이며 우주는 유일한 우주이니 다른 걸 상상할 수 없죠. 처음 나오느냐 두 번째 나오느냐에 관계없이 대화자 모두가 알고 있다고, 다시 말해 화자 뿐 아니라 청자 또한 ‘아 그거’라고 특정할 수 있다고 인식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항상 the와 함께 쓰입니다.

한 가지 더할 것은 특정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명사는 가산성이나 단복수성과 관련이 없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the를 붙여 특정할 수 있는 명사는 셀 수 있는 명사일 수도 (the apple), 셀 수 없는 명사일 수도 (the money) 있습니다. 또한 단수건 복수건 전혀 상관이 없기에 the apple이나 the apples 모두가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a moon’이나 ‘a universe’는 불가능한 것일까요?

달 vs. 위성, 유일한 우주 vs. 여럿 중 하나의 우주

말씀드렸듯이 현재 지구에서 ‘달’이라고 하면 하나의 달을 떠올립니다. 토끼가 절구질을 하고 있는 그 달이죠. (여기에서 지구를 돌고 있다는 다른 달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기에 ‘달’이라면 “the moon”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지구에서 달을 가리킬 때 반드시 the를 붙여서 쓰는 것은 아닙니다. 달의 양태는 여럿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달의 여러 모양 중 하나인 ‘큰 보름달’은 ‘a great full moon’이라고 할 수 있죠. ‘a blue moon’이나 ‘a half moon’이라는 표현도 가능하구요. 여러 형태와 색깔을 가진 달 중에 하나를 가리킨다면 ‘a ~ moon’을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a moon’이 가능한 경우가 또 있습니다. 지구인은 유일한 달을 이야기하므로 ‘the moon’으로 쓸 수밖에 없지만, 달이 여러 개인 행성이라면 말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 목성에는 달이 79개가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라면 “The Earth has a moon while Jupiter has 79 moons.”라고 쓸 수 있습니다. “목성은 달이 79개이지만 지구는 달이 하나다.”라는 의미인데, 이 경우 ‘moon’은 평소 말하는 달이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위성(satellite)의 뜻이 됩니다. 특정될 수 없는 일반적 개체가 되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우주는 보통 ‘the universe’이지만 ‘a universe’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중우주론을 주장하는 물리학 이론에 따르면 이 우주 외에 다른 우주들도 있지요. 이 경우 현재 우리가 지각하고 살아가는 우주는 여럿 중 하나의 우주 즉, ‘a universe’입니다. 다른 우주들을 포함해서 ‘universes’라는 말을 쓸 수 있고요. 따라서 복수의 우주를 가정하는 이론체계 안에서는 “multiple universes”라는 표현이 얼마든 가능한 것입니다.

정관사, 부정관사, 그리고 총체와 가능성으로서의 세계

이와 같은 논리는 세계를 나타내는 world에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음 예문을 보시죠.

a) The world is full of sorrow.
b) We want a better world.

위의 두 예문에서 ‘world’ 앞에 서로 다른 관사가 쓰였습니다. a)에는 정관사 the가, b)에는 부정관사 a가 쓰였죠. 왜 이런 차이가 오는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세계’라고 말할 땐 ‘the world’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유일한, 그리고 특정한(specific)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b)에서 ‘world’는 가능성으로서의 세계입니다. 지금 눈앞의 세계는 하나일지라도 미래에 가능한 세계의 가능태는 수없이 많고 그 중의 하나가 바로 ‘a world’입니다. 그렇기에 ‘a better world’ 뿐 아니라 ‘a greater world’, ‘an ideal world’, ‘a miserable world’ 등의 표현도 가능하죠.

달은 하나이지만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세계는 하나의 총체이지만 가능성으로서의 세계는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유일하게 정해진 것(definite)처럼 보이는 것들도 결코 특정한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는(indefinite) 것입니다. 어떤 틀에서 개념화되느냐에 따라서 그 인식론적 지위(epistemological status)가 달라지고, 함께 쓰이는 관사도 바뀌는 것입니다.

관사, 인식론적 지위를 트래킹하는 시스템

이렇게 보면 관사는 말하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명사의 인식론적 지위를 따라가는 일종의 트래킹 시스템(tracking system)입니다. 즉, 명사에 ‘꼬리표’를 달아 말하는 이가 지칭하는 바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관사를 쓰는 경우 화자는 청자가 자신이 말하는 명사를 특정(specify)하여 따라올(track)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고, 부정관사를 쓰는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 개의 개체 중 하나라는 것만 인식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지요. (자세히 논의하지 않았지만 관사를 아예 쓰지 않는 무관사(zero article)의 경우도 나름의 기능이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저의 예전 영어선생님이 신정보/구정보의 틀로 부정관사와 정관사 사용을 구분했던 기술방식보다 훨씬 정확하게 관사의 사용을 포착합니다. 아인슈타인의 말을 따르자면 제 중학교 때 선생님의 설명은 “simpler(실제보다 더욱 단순화한)”한 것입니다. 이런 설명은 임기응변은 될지 모르지만 문법에 대한 혼란을 가중시키고 언어현상의 본질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학생들을 좌절시킬 수 있습니다. 제가 그랬듯 말입니다.

 

영어 관사와 화자의 의도: 아래 글에 이어 쓰려고 하다가 길어져서 쓰지 못한 이야기

관사의 쓰임을 신정보/구정보로 설명하는 방식은 또 하나의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관사의 쓰임을 온전히 텍스트 안에서 설명하려고 든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제가 소설의 첫 문장을 “I hugged the tree.”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고 가정해 보죠. 이 경우 전통적인 구정보/신정보 관점에서는 소설의 첫 문장이므로 “the tree”가 어색한 것이 됩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 문장은 전혀 어색하지 않지요.

사실 작가는 독자가 이 문장을 처음 읽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쓰는 책이니 모를 수가 없죠. 하지만 의도적으로 정관사를 쓴 것입니다.

작가가 이야기를 어떻게 끌고 나갈지는 알 수 없지만, 독자들에게 ‘나무’에 대해 특별한 설명을 붙이지 않는다면 “the tree”가 무난할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나무에 대한 호기심을 이끌어내려 할 경우에도 “the tree”가 ‘a tree’보다 적절한 선택이겠죠. 이어서 “I smelled the soil and walked with the dogs. I watched the river a while, serene and weary.” 같은 문장을 제시한다면 이들 명사가 하나의 앙상블(ensemble)을 이루어 더 큰 호기심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가 묘사하는 이 곳이 대체 작품에서 어떤 의미를 차지하는 거지’라는 생각을 자아내는 것이죠.

따라 이런 경우 the tree 자체가 신정보냐 구정보냐의 문제가 아니라, 화자(작가)가 특정한 명사를 신정보로 개념화하느냐 구정보로 개념화하느냐의 문제가 더욱 중요합니다. 즉 화자는 정관사라는 도구를 통해 의도적으로 ‘알려진 것인양’ 포장할 수 있다는 것이죠. 사실 독자들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개체들을 연달아 the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추후 설명될 것’이라는 언질을 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화자의 의도를 명확히 하고 수사적 효과를 거두기 위해 처음 등장하는 명사에도 the를 얼마든지 붙일 수 있다고 봐야 합니다. The의 선택 여부는 단지 텍스트 내의 규칙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사용자의 의도와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교과, 범위를 넘어 깊이를 고민할 때

1. 여러 교과과정의 범위를 둘러싼 논쟁을 접하다 보면 너비만큼 중요한 깊이, ‘무엇’만큼 중요한 ‘어떻게’에 대한 논쟁은 거의 없음을 깨닫게 된다. 타교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니 영어교과에 국한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오로지 시험을 위해 공부했던 탓인지 영어를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업이 뿌듯했던 적은 별로 없다. 중고교 시절 누구보다 영어지문을 많이 읽은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최선이 아니었음은 확신할 수 있다.

2. 적정한 범위를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범위를 지켜내는 일이 공부의 기쁨을 회복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문법을 가르칠 것이냐 말 것이냐, 어디까지 가르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어떤 문법이냐가 더욱 중요하다.

3. 흔히 ‘기본개념’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가르치다 보면 여러 개념들을 빠르게 숙지하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은 필연적으로 갈린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잘 못해도 좋아하는 학생’이 어쩌다 하나씩 있다는 것이다.

4. 나는 천문학을 잘 모른다. 기본개념도 그리 잘 아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밤하늘을 보고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을 좋아하고, 은하의 크기를 나타내는 광년을 들으면서 머리 속에서 유랑하는 빛줄기를 그려보는 것을 좋아하고, 인간의 머리로 상상할 수 없는 ‘심원한 시간(deep time)’을 상상해 보고자 하는 무모함을 사랑한다. 천문학의 개념들을 통해 먼지만도 못하지만 무한에 잇대어 있는 삶을 귀히 여기게 된 것이다.

5. 다시, 범위는 중요하다. ‘무엇’의 문제는 논쟁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학습자들을 어디로 이끌어야 할지에 대하여 좀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아는 것 만큼 느낄 수 있고, 느끼는 것 만큼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교과를 궁리해야 한다.

6. 이 시대의 영어교육은 학생들로 하여금 언어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들 사이를 여행하며 깊은 소통을 갈구하도록 만들고 있는가? 말을 통해 삶을 사랑할 힘을 키워주고 있는가?

다른 교과들은 어떠한가?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삶을위한영어공부

부끄러움에 대하여

Posted by on Apr 18,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집필 | No Comments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부끄러움이 없음을
부끄러워하지 못한다.

최근 잇단 정치인들의 망언을 보며 생각난 말이다.

부끄러움이 없으니
부끄러워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부끄러움이 없는 것과
부끄러움이 없길 바라는 마음은 다르다.

시인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빌었지만

이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노래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는 부끄러워하고 싶지 않았지만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고
그 부끄러움을 감당하는 방법은 필연적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자라야
사랑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움이 없으면
부끄러운 것이 없음을 부끄러워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것이 없음을 부끄러워하지 못하면
부끄러울 것이 없다.

부끄러움과 메타-부끄러움은
이렇게 서로 엮어 있고
그런 부끄러움의 고리를 벗어날 길은 없다.

그렇다.
그런 길은 없다.

오직
괴로움과
사랑만이 있을 뿐.

변증적 성격을 지닌 부정관사: 5년 전 오늘을 기억하며

영어 부정관사 a(n)은 상황에 따라 두 가지 상반된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구별하지 않고 언어를 사용하지만 사실 전혀 다른 층위의 개념을 표현합니다.

1. 먼저 어떤 개체 하나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He has a sister. She is very smart.”

여기에서 ‘a sister’는 한 명의 여자형제라는 뜻입니다.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sister들 중 한 사람인 것이죠.

2. 이에 비해 “a + 명사”가 한 개체가 속한 집단 전체를 대표할 수 있기도 합니다. 아래와 같은 경우입니다.

“A dog will be a great partner in your life.”

이 경우에 “A dog”은 ‘개 한 마리”라기 보다는 “개” 즉, 집단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개라고 불릴 수 있는 모든 동물을 대표하는 표현이지요.

1과 2는 결코 같다고 할 수 없지만 우리의 사고 속에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는 개념입니다.

한 사람은 개인임과 동시에 인간이라는 종을 대표할 수 있는 특징을 지닙니다. 개별 안에 일반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야기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좋은 이야기는 하나의 특수한 이야기면서도 누가 읽더라도 울림을 주는 요소 즉 보편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죠.

“A(n)”의 의미는 이렇게 변증적(dialectic)입니다. 집단에 속해 있는 하나의 멤버 (one member) 이지만, 때로는 그 집단 전체를 가리킬 수 있으니까요.

저는 관사의 이런 변증적 성격을 통해 한 사람과 인류 전체의 관계에 대해 생각헤 보곤 합니다. “a person”은 “한 사람”임과 동시에 “모든 사람”일 수 있다고 말이죠.

5년 전 오늘 수많은 생명들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우리 곁을 떠난 한분한분은 단지 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였을지도 모릅니다. 인류 전체였을지도 모릅니다.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이 아니며,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임과 동시에 대양의 일부”라고, 그리하여 “그 누구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고 노래한 존 던의 시처럼 말입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한분한분 안에 담겨 있던
온 우주를 기억하겠습니다.

못난 저를 보니
쉽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부탁하고 또 기원합니다.

거친 세상 속
망각으로 빠져들어가는
서로를 굳건히 붙잡아 주는
우리가 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문화기술지, 균열, 그리고 연결

Ethnography(문화기술지)를 말 그대로 풀면 “ethno+graphy” 즉, 사람과 사회, 문화를 써내려가는 일(the writing of people, of society, of culture)이다.

나는 문화기술지를 “ethno”와 “graphy”의 유기적 결합 및 해체로 파악한다. 말(graphy; text)과 주체-들(ethno; people) 사이를 오가며 이 둘을 결합하고 때로는 분리시키는 일 말이다. 텍스트를 다루다 보면 자칫 사람을 이해했다고 오해하기 쉽고,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텍스트가 없어도 세상이 온전히 이해되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렇지 않다. (오랜 기간 광화문 교보문고에 걸려있던 문구와는 조금 다른 결에서) 텍스트는 사람을, 사람은 텍스트를 만든다. 이 둘은 통합되어 있지만 또 균열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균열의 지점을 자세히 살필 때 사람도 말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뇌의 이상이 뇌의 기능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처럼, 말과 삶의 균열이 말과 삶의 연결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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