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메커니즘

Posted by on Apr 23,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자신이 쓰는 말 하나하나가 국어를 바꾼다는 생각을 못하지만, 이 메커니즘을 제외하고 언어 변화를 설명할 길은 없다. 자신의 작은 실천 하나하나가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생각을 못하지만, 이 메커니즘을 제외하고 역사와 사회의 변혁을 설명할 길은 없다.

큰 일을 이룰 방법은 작은 일밖에 없다. #다시쓰기

조삼모사

Posted by on Apr 20, 2018 in 일상 | No Comments

조삼모사(?) 혹은 줬다 뺐기(?) 3단계

1. 단기

단체로 한 식당에 갔는데 음식이 너무 맛있고 푸짐해서 하나를 더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엔 양이 확 줄어서 나오더군요.

일행 중 하나: 아, 아깐 이거보다 엄청 더 주셨던 거 같은데요.
주인: 아, 아까 저희가 잘못해서 2인분을 드렸어요.
일행: ……………

2. 중기

개교기념일 전체 휴강 공지 메일을 읽는다.
하루 더 쉴 수 있다니 너무 좋다!
맨 아래 보강 안내 공문이 첨부되어 있다.

3. 장기

(미국의) 서머타임제.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동어반복[同語反覆]

Posted by on Apr 18,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슬픔이 슬픔에 그치는 슬픔 없기를.

자연스럽게 헤어지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게 있을까.

어울리지 않는 것들과 어울리지 않는 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

‘동어’를 ‘반복’한다고 하지만,
다시 말하는 순간 ‘동어’가 아닌 듯합니다.
같은 길이와 높이의 음도 두 번을 치면,
첫 번째 음과 두 번째 음이 생기듯 말이죠.

속좁은 사람의 잡담 몇 개

Posted by on Mar 26, 2018 in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1. 종종 타임라인에 공유되는 ‘명언’ 중에 “Great minds discuss ideas; average minds discuss events; small minds discuss people. (위대한 사람들은 사상을 논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사건을 이야기하며, 작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한다.)”라는 Eleanor Roosevelt의 말이 있다. 원문을 확인해 보지 않아 이 문장이 나온 정확한 맥락은 모르지만, 날이 갈수록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들이야말로 사람들에 대해 더 깊이 이야기하고, 그들을 위해 정성을 다하려는 이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 없는 사상’ 보다는,’사상 없는 사람’의 편을 택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이런 양극단이 존재할리 없겠지만, 굳이 고르라면 말이다.)

2. <위플래시>의 플레처 교수의 훈육법에 대해 ‘저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예술가는 혹독한 훈련을 거쳐야만 해’라며 동의하는 분들이 있다. 플레처 같은 선생이 없으면 한계를 뛰어넘는 예술가가 어찌 나올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인 듯하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 앤드류의 신들린 연주 장면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플레쳐의 옛 제자 케이시를 보았다. 통쾌하지만 슬펐고, 아름답지만 무서웠다. 왜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예술’을 보고 싶어 하는가? 그렇게 태어나는 ‘천재’의 그늘에 가려진 수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숨어버렸나? 한계를 뛰어넘은 예술은 한계를 넘지 못한 이들의 아픔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가?

3. 돌아보면 남에게 모질지 못했던 만큼, 목숨걸고 어떤 대상에 진력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배움은 언제나 애매한 지점에서 멈추었다. 영어도, 사진도, 음악도, 글씨도, 심지어는 전공이랍시고 한 응용언어학까지 말이다. 이런 얄팍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한계에 도전하지 못했던 나는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다.

4. 엉거주춤한 모양새로 살아온 나를 지탱해 준 것은 늘 사람, 사람이었다. (남들에겐 별것 아닐지 몰라도) 두어 차례 큰 고비가 있었고, 그때마다 내 의지가 아니라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버텨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도움의 손길들이 큰 사상에 기대있었는가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날 버티게 한 힘은 약속도 댓가도 없는 함께함의 가치를 알았고, 무엇이든 쪼개어 주길 좋아했으며, 사소한 다침으로 마음을 닫지 않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거창한 아이디어(ideas)를 좇았다기 보다는 못나디 못난 인간(people)을 받아주고 견뎌낸 친구들이었다.

5. 적어도 내게 위대한 영혼은 사람들 곁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속좁은 나에게 위대함은 사상이 아니라 사람을 향해 있는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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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오늘 쓴 글을 다시 읽는다. 사상과 이론을 공부하고 따르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닮으려 하지만, 여전히 나의 속은 좁은 것 같다.

생활의 지혜: Reaction Paper 편

Posted by on Mar 25, 2018 in 강의노트, 수업자료 | No Comments

Reaction paper를 낼 때 유의할 점:

1. 논문을 안읽고도 쓸 수 있는 글을 내지 않습니다. (Re-action은 무엇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냥 혼자 action을 취하지 말아 주세요.)
2. 단순 요약문을 내지 않습니다. (초록보다 나을 게 없는 글을 왜 굳이 내려고 하시나요?)
3. “흥미로왔습니다”, “좋았습니다”, “인상적이었습니다”, “별로였습니다” 따위의 반응은 마움 속에 고이 간직합니다. (“할 말이 없을 때 ‘That’s interesting.’이라고 한다”는 말이 있죠.)

저도 오래 전에 이럴 때가 있었겠지만… “나는 ‘바담 풍’ 해도 너는 ‘바람 풍’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줄탁동시

Posted by on Mar 24, 2018 in 강의노트,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교육에서 선생과 학생 사이의 관계와 협업에 기반한 배움을 이를 때 종종 쓰이는 사자성어다. 하지만 나는 문구를 볼 때마다 개인과 사회의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서는 변증적 세계관을 떠올린다. “세상이 바뀌려면 내가 변해야 하는가? 사회야 변해야 하는가?” 정답은 “동시에 변하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아닐까? 나의 몸과 마음은 철저히 사회적이고, 사회는 수많은 몸과 마음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니.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영어-학습-자

영어를 좋아하지 않는 영어학습자를 대함에 있어서 ‘영어’에 집중하곤 한다. 하지만 ‘영어’ 보다는 ‘학습’ 전반이, ‘학습’ 보다는 ‘자者’ 즉 사람의 문제가 더욱 근본적이다. 이런 면에서 영어교육전문가의 전문성은 양날의 검이다. 자칫하면 사람보다 공부를, 공부보다는 영어를 중심에 놓고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수포자’, ‘영포자’, ‘과포자’ 등의 명명은 현상의 근원에 닿지 못하고 개별 과목 중심의 사고를 강화한다.

총체적 관점을 이야기하면 개별 교과의 문제도 풀지 못하는 상황을 이야기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개별 교과의 문제가 풀리지 않는 이유를 생각하면 결국 총체적 관점 즉, ‘인간으로서의 발달’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with 철

미디어 활용 교육

미디어 활용이 리터러시 교육의 주요 의제로 떠오르고 있다. 다양한 미디어와 기술을 동원하여 자신이 원하는 컨텐츠를 만들고 나눌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미디어 활용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특별한 이견은 없다.

하지만 종종 ‘활용’에만 골몰하는 교육의 한계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미디어를 활용하는 교육은 미디어를 활용하지 않는 상황을 상정하지 않는다. 모든 것들이 새로운 테크놀로지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랄까.

이러저러한 이유로 주류 메신저를 활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기에 메신저를 활용한 소통도 중요하지만 메신저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소통도 중요하다. 첨단 기술을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술 바깥의 삶에 대해 상상해 보는 일 또한 소중하다.

언젠가 ‘~할 수 있다’는 진술로 구성된 교육목표(Can-do statements)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나는 교육의 목표가 일련의 ”Can-do statements’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진술들 행간에 존재하는 ‘Can’t-do statements’를 이해하는 것이라 믿는다. 할 수 없음에 대해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높은 수준의 교육목표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이 글을 쓰고 나니 갑자기 고정희 시인의 시 한 편이 떠올랐다. 별 연관이 없는 것 같지만 적어도 내 맘 속에서는 분명 통하는 바가 있다.

===

사랑법 첫째
고정희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 내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탄핵 1주년

Posted by on Mar 10, 2018 in Uncategorized, 단상, 일상 | No Comments

새벽까지 일하다가 천근만근 몸을 뉘였다. 잠이 오지 않아 한참을 뒤척였다. 꿈속에서도 전에 일했던 직장들을 전전하며 또 일했다. 퇴근 후 광장에 나가 “이제 다시 시작이다!”를 외쳤다. 잠에서 깨어나 어제 보내기로 해놓고 까맣게 잊은 자잘한 서류들이 생각났다. 딱 부서지지 않을 정도의 몸상태로 너무 오래 달려왔다. 쉬고픈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기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이 내일 오전에 있다.

나는 수업을 하고 있다. 학생들은 힐끔거리며 핸드폰을 본다. 한 학생과 눈이 마주친다. “그냥 궁금해서요.”라며 씨익 웃는다. 삽시간에 교실 전체가 들썩거린다.

“잠깐 쉬었다가 하죠.”

복도로 나가 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딱 그 정도로 눈물을 흘린다.

수업 후반부가 시작된다. 나는 힘주어 말한다.

“오늘 수업 이제부터가 중요해요.”

2017.3.9.

탄핵심판 하루 전 썼던 글. 한 해가 지났고, 그간 큰 변화가 있었지만 하루하루의 일상은 여전하다.

누가 누구를 높이거나 숭앙崇仰 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에게 박수쳐 줄 수 있는 순간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몇몇 사람들이 삶을 통째로 갈아넣어야만,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무릅써야만 가능한 변화 따위는 없는 세상이 오길 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언제나 그랬다.

상호복수, 그리고 “우리가 친구가?”

 

예전에 “상호복수”라는 개념에 해당하는 여러 표현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shake hands with someone’에서 hands가 복수인 이유는 손이 두 개라서라고 하죠. (물론 두 사람 모두 양손으로 악수를 하는 경우 네 개가 되겠죠.) 다른 예로 take turns / change seats 등이 있습니다. be on good/friendly terms with someone도 있군요.

페이스북에서 이미 친구가 된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친구 수락을 누르니 이렇게 나오네요. You are friends with this person. – 상호복수 문법에 따르면 상대와 나를 포함하기에 ‘friends’라는 복수형을 쓰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문법적으로는 이런데 페이스북의 “unfollow’ 기능을 생각해 보면 개념적으로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습니다. 분명 친구 사이이지만 unfollow를 할 경우 상대방의 소식이 사라지기 때문이죠.

즉, A는 B의 소식을 보지만, B는 A의 소식을 보지 않게 되는 ‘정보 비대칭 (실은 정서 비대칭)’의 상황이 되는 겁니다. 상호친구 사이에서 일방적인 친구 사이가 된달까요?

이 상황에서 ‘상호복수’ 개념은 그야말로 껍데기 느낌입니다. 정리하면 이런 거죠.

You are friends with this person. However, the person is not friends with you.”

저 unfollow 하신 분들은 이거 안보이실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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