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정신의 실체

“작가정신”은 작품의 완결성에 대한 고집으로 보이지만 이를 지탱하는 것은 돈과 생산성의 압박에 대한 저항일지 모른다. 단어 하나 하나에 서려 있는 인내와 고통, 생활고와 고독의 흔적일지 모른다. 때로 완성된 글보다 굴하지 않고 써내려갔을 시간이, 그 과정을 이겨낸 작가와 이를 응원해준 주변 사람들이, 본문보다 감사의 글이 더 뭉클한 이유다.

그런 면에서 ‘OO일 안에 책 한권 쓰기”와 같은 강좌는 양날의 검이다. 긴 글을 기획하고 완성하는 기쁨을 맛보게 한다는 취지야 뭐라 할 수 없겠으나, 일정을 못박고 완성으로 달려가는 출판 프로젝트에서 ‘책’만 남고 ‘쓰기’가 탈각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책쓰기를 ‘커리어 쌓기에 있어 최적의 전략’으로 광고하는 걸 본 적도 있으니 이런 생각이 단지 ‘꼰대 마인드’만은 아닐 것 같다.

쓰기가 수단이 되고 기능이 되고 스펙이 되는 걸 막을 길은 없다. 하지만 ‘수단, 기능, 스펙’이 모든 것이 되어버린 쓰기공부는 의심스럽다. 리터러시의 세계는 상품의 시장보다는 자연생태계였으면 한다. 생태계 안에서 시장은 흥망성쇠를 거치지만 시장은 생태계를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총체적 리터러시 발달

‘영어공부’를 단순히 영어실력의 향상이 아니라 모국어를 포함한 총체적 리터러시 발달의 관점에서 보게 하는 것. 어렵지만 해야 할 일 아닌가 싶고, 이런 생각을 같이하는 분들과 꾸준히 만나고 싶습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유학가기 전 해야 할 일

예전엔 유학가려는 학생들에게 영어공부를 좀 하라고 했던 듯하다. 지금은  우리말 책을 최대한 읽으라고 한다. ‘완벽하지 않은’ 글에 힘과 의미를 불어넣는 것은 조금 더 나은 영어라기 보다는 깊이있는 내용과 관점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상대는 언제나 자신을 통해 이해된다.

 

1. “상대의 말을 이해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절반의 진실이다.

2.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는 것은 두 축이다.

3. 첫 번째 축은 상대의 발화를 상대의 말 속애서 이해하는 것이다. 화자가 ‘우정’이라는 말을 썼다면 청자는 ‘우정’이 발화된 맥락을 살피고 그 안에서 ‘우정’의 의미를 이끌어낸다.

4. 두 번째 축은 자기 자신이다. ‘우정’이라는 말이 이해된다는 것은, 이 말이 나의 세계 안에 이미 들어와 있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정’의 의미를 자신의 뇌 안에서 끄집어낸다.

5. ‘우정’은 이 두 축의 교집합에서 만들어진다. 상대가 의미하는 우정과 내가 이해해왔던 우정이 융합되면서 ‘우정’이 이해되는 것이다.

6. 소통이 잘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 두 축의 교집합이 커야만 한다. 교집합이 최소화될 때 화자의 ‘우정’과 청자의 ‘우정’은 서로 다른 의미가 된다. 조지 레이코프가 “누구의 자유인가?”에서 논의하듯 미국 민주당 리버럴의 ‘자유’와 공화당 보수파의 ‘자유’가 같을 수 없다.

7. 이 교집합의 생성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영향을 미친다. 당장은 서로가 서로의 말을 열심히 듣느냐의 문제다. 흔히들 ‘경청’이라고 부르는 게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경청한다고 이해와 소통이 될 리는 없다. 화자와 청자의 언어가 터하고 있는 사회문화적, 정치경제적 기반이 완전히 다르다면 비슷한 단어를 쓴다 해도 그 의미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8. 단시간에 이 교집합을 늘릴 방법이 있을까? 회의적이지만 해야할 일들이 있다.

9.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을 꼽는다면 “상대의 말은 언제나 나를 통해 이해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나의 말 또한 언제나 상대를 통해 이해된다.

10. 그런 면에서 대화상황에서 화자는 청자의 말을 그대로 이해할 수 없다. 언제나 자기 자신을 통해 이해한다. 마찬가지로 상대 또한 나의 말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없다. 상대가 살아온 삶의 궤적과 쌓아온 지식, 태도 등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상대를 나라는 거울에 비추지 않고 볼 방법은 없다. 모든 이해는 듣는 사람으로 매개된 이해다.

문해력 타령 유감

리터러시 주변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지만 가끔은 공통의 지반(common ground)이 무너지고 있는데 문해력 타령하는 사람들이 보여 갑갑하다. 해解는 각자가 할지 모르지만 문文은 사회가 생산한다. 그리고 차력사가 아니라면 력力 자랑은 삼가는 것이 좋다. #삶을위한리터러시

낭독과 묵독, 매체의 변신

A: “책을 읽으면 되었지 왜 낭독을 해?”
B: “악보를 눈으로 읽고 마음속으로 들으면 되지 왜 노래를 해?”
A: 그게 어떻게 같냐?
B: 같다고는 안했어. 그런데 같은 분명 같은 면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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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독은 정보를 조용히 받아들인다. 그 정보는 (어린이와 같이 아직 묵독의 기술을 완전히 익히지 못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기본적으로 문자정보이다. 텍스트의 정보가 눈을 통해 뇌로 들어와 이것이 의미화되는 과정인 것이다. (그렇다고 문자정보에 매치되는 청각정보가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시각정보에 의존한다는 의미다.)

낭독은 다르다. 낭독을 하기 위해서는 정보를 받아들인 뒤 이를 나의 발성기관을 통해 세계로 내보내야 한다. 수반되는 정보는 단지 시각적이지 않다. 머릿속에서 발음과 관련된 정보처리가 일어나고, 필요한 근육운동이 동원된다. 이는 나의 몸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며, 이를 통해 생산된 음성을 내가 다시 듣는다. 낭독모임을 하는 경우라면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된다. 높낮이와 떨림, 크기와 어조 등 목소리와 관련된 모든 특징들이 공유된다.

낭독은 정보가 몸을 거쳐 소리로 물화되는 과정을 수반한다. 이는 텍스트의 글자를 주로 시각을 통해 머리 속에서 처리하는 과정과는 엄연히 다르다. 결국 책을 조용히 읽는 행위와 낭독하는 행위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책은 낭독을 통해 새로운 미디어로 변신하며, 이는 사람과 책의 관계,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변화시킨다.

결론: 나는 낭독하는 모임이 좋다. (아니 이게 왠 삼천포?)

#삶을위한리터러시

매체에 대한 착각

“모든 매체에는 의사소통의 측면에서 고유의 변증법이 있다. 즉 매체는 그 매체를 통해서 소통하는 것들을 연결하고 분리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바로 이 변증법이 매체(medium)라는 개념의 정확한 의미이다. 그러나 정보전달의 과정에서 그것의 존재가 망각되는 매체들(이른바 면대면 매체)이 있다. 예를 들어 원형 탁자에서 대화를 할 때, 이 탁자의 존재는 잊히고, 나아가 우리가 그것을 통해 말을 하고 있는 공기의 존재도 잊혀진다. 그러니까 우리는 몸이 서로 닿지 않는데도 직접적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는 — 언제나 잘못된 — 인상을 받는 것이다. 이런 인상이 잘못인 이유는, (모든 분석을 회피하는 신비적 합일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직접적 소통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인상은 비록 잘못된 것일지라도, 그 의사소통을 만족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전화는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결코 잊히지 않는 매체이다. 이것은 전화의 기술적 성격 때문이 아니다. TV는 전화보다 훨씬 더 기술적인데,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의 존재를 잊는다. 불행하게도 이 점이 TV의 담론을 만족스럽게 만든다. 전화 연결망에서의 대화는, 그 대화가 대화를 중개하는 매체를 실질적으로 안보이게 하는 데 성공할 경우에만 비로소 만족스러운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기술적인 도전일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정치적인 도전이기도 하다.” (빌렘 플루서, 몸짓들, 203-204)

이미지와 정치, 그리고 시늉사회

Posted by on Jan 13, 2019 in 단상, 링크,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 No Comments

빌렘 플루서는 정치와 이미지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

애초에 사진은 정치를 기록(documentation)하기 위해 존재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특히 20세기 초와 2차대전을 지나면서, 정치는 ‘이미지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전까지 정치는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정치는 이미지로 향한다는 걸. 이미지화 되는 것이 정치의 목적이라는 걸.

나는 플루서가 말한 ‘이미지로 진입하기 위한’, ‘이미지를 생성하기 위한’ 일들이 만연한 사회를 ‘시늉사회’라고 부른다. 시늉이 일을 하는 시대. 시늉만이 효과인 시대. 시늉에 익숙해지는 것이 현명한 것으로 칭송받는 시대.

시늉에 진심이 없을까? 진심을 다해 시늉하는 사람들이 정말 없을까? 그런 ‘열정적 시늉’에 대해 이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미지로 걸어들어가는’ 정치를, 구조를, 자선을, 운동을 걷어치우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제 더이상 이미지화 되지 않는 정치는 불가능한 걸까.

http://www.hani.co.kr/arti/animalpeople/human_animal/878179.html

‘을량(乙量)’ 총량의 법칙

Posted by on Jan 13,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집필 | No Comments

“말하는 순간 ‘을’이 돼.” 친구가 말했다. 그래서 다들 침묵의 섬으로 살아가는 걸까. ‘을’이 될 가능성을 삼켜버린 사람들. 함께 일해보자고 손내미는 일이 위협이 되는 때, 우린 스스로에게 을이 되는 건 아닐까.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어떤 절망

Posted by on Jan 11, 2019 in 단상, 일상, 집필 | No Comments

자본주의의 모순과 불평등에 대해 엄밀한 분석을 수행한 후 “그러니까 나는 부유한 자본가가 되겠어”라고 마음먹는 일. 신자유주의의 말할 수 없는 잔혹함에 대해 공부한 후 “그러니까 나는 경쟁에서 이겨야만 해”라고 결심하는 일. 참혹한 개천에 대해, 그 삶의 비루함에 대해 이야기한 끝에, “나는 저들과 함께 하지 않겠어. 꼭 용이 되어 탈출하겠어.”라고 주먹을 불끈 쥐는 일.

그런 일들이 자연스러워지는 세계에서 절망하는 영혼을 바라보는 일.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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