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광고 유감

Posted by on Nov 14, 2018 in 삶을위한영어공부, 영어, 집필 | No Comments

언젠가 “당신의 영어는 안녕하십니까?”라는 광고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안녕한 영어’가 있다면 ‘안녕하지 못한 영어’가 있을 것입니다. 한 언어가 안녕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질문은 이어 나오는 “진짜 네이티브처럼 영어하고 싶은 당신”과 “원어민들만 알아듣는 슬랭(slang)”이라는 문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원어민처럼 이야기하지 못하고 원어민이 못알아듣는 영어는 ‘안녕하지 못한 영어’가 되는 것입니다.

David Crystal의 추정에 의하면 영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사람은 약 4억 명, 제2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약 4억명, 외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약 6-7억 명 정도입니다. 즉, 모국어가 아닌데 영어로 소통할 일이 있는 사람들이 어림잡아 10-11억 명이라는 말입니다. 이에 따르면 “원어민만 알아듣는 영어”를 공부하는 것은 효율성 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속어라면 더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이런 데이터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 “네이티브”의 힘은 여전히 막강합니다.

제 말은 네이티브와 같지 않습니다. 네이티브만 알아듣는 표현들도 별로 알지 못할 겁니다. 그렇기에 저의 영어는 안녕하지 못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안녕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그런 안녕함을 묻는 거라면 대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던 길을 계속 갈 것입니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광고 문구는 “영어가 안나와, 너무 미안한데…”입니다. 물론 영어가 안나와 미안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미안할’ 필요는 없지요. 도리어 미안함이 마케팅 포인트가 되는 사회가 개개인에게 심히 미안해 해야만 합니다. 기타를 못친다고 미안해 하거나 상냥한 미소를 짓지 못한다고 미안할 필요는 없습니다. 영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소수자의 언어를, 이주노동자의 언어를, 다문화 아동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 미안하지 않지만 영어를 못한다는 사실에는 너무나 미안한 사회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정말 미안해야 하는 건 따로 있을지 모릅니다. 너무 미안한 영어는 영어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때로 광고는 우리의 불안을 파고듭니다. 열등감을 자극합니다. 비교와 경쟁을 부추깁니다. 무엇보다 속도를 강조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전략 아니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안감과 초조함 위에서는 결코 견실한 공부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몇 주 안에 엄청난 변화를 이뤄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또다른 세계로 가는 문을 여는 일입니다. 외국어 하나를 깊이 익히는 것이 우리의 삶에 가져오는 변화를 생각해 본다면 영어를 너무 쉽게 보아서는 안됩니다. 여정이 길어 보인다고 한탄만 해서도 안됩니다. 수많은 광고처럼 그렇게 쉽게 이뤄지는 공부는 없습니다.

광고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종착점만을 바라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나’, ‘영어를 잘한다고 인정받는 나’, ‘영어로 업무를 능숙하게 처리하는 나’만을 그려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소리를 반복해서 혀끝에 올리고, 썼던 문장을 고치고 또 고치는 과정을 건너뛰려는 얄팍한 욕심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영어공부의 과정이 꼭 고통스럽지만은 않습니다. 하루하루의 공부 속에서 반짝이는 기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씩 성장해 가는 자신을 바라보며 뿌듯한 성취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부의 본령은 언제나 과정에 있습니다. 외국어 공부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불안과 공포를 자극하는 광고에 흔들리지 말았으면 합니다. 조바심 내고 초조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루하루의 공부 속에서 소박하지만 단단한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일. 공부에는 그 길 밖에 없습니다. 순간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만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언어를 만날 수 있습니다.

#삶을위한영어공부

#초안집필중

 

‘1991, 봄’, ‘국가에 대한 예의’, 그리고 ‘강기훈 말고 강기타’

Posted by on Nov 13,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감히 과거가 품을 수 없는 사건이 있습니다. 역사라는 틀에 가둬두려 해도 자꾸만 뛰쳐나옵니다. 꾸짖고 흔들고 소리치고 울부짖습니다. 속삭임마저 폐부를 찌르는 공기의 파장을 만들어 냅니다. 그렇게 과거가, 역사가 가둘 수 없는 이들은 지금 이 시대 또 다른 얼굴로 우리와 마주합니다.

저에겐 그 중 한 사람이 강기훈입니다.
오늘 네 번째 본 <1991, 봄>을 통해 그를 다시 만났습니다.

가공할 권력을 지닌 국가기관이 한 개인에게 조직적이고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였습다. 그의 인생 뿐 아니라 주변까지 철저히 파괴하였습다. ‘재판’ 혹은 ‘법적 다툼’이라는 프레임으로 사건을 묻어버리려 했습니다. 여전히 국가는 진심어린 사과도 반성도 없이 ‘법원의 판단 존중’이나 ‘항소 포기’ 따위의 레토릭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국가가 무슨 짓을 한 건가요.

야만의 시간을 견뎌낸 한 사람이 수줍게 웅크립니다. 슬며시 기타를 듭니다. 숨을 고릅니다.

강기훈의 <카바티나>를 배경으로 먼저 떠나간 이들의 말이 흐릅니다. 무자비한 국가폭력에 맞서다 자신을 던진 이들의 얼굴들과 만납니다. 그의 연주는 과거를 묻어버리려는 몸부림도, 극심한 고통 속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제스처도 아닙니다.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말로는 턱없이 모자란 참혹한 여정을 지나왔음에도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고 아름다움 안에 머물 수 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시대의 한복판에서 바흐의 음악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아마추어 기타리스트. 기자회견을 하다가 안경을 벗고 얼굴을 책상에 묻어버린 수배자. 수많은 친구들을 먼저 보내야 했던 청년. 지나치는 사람들의 그림자에마저 자리를 내주는 사람.

그의 삶을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기타는 고요히 웁니다. 관객들도 따라서 숨죽여 웁니다. 이해할 수 없어, 가 닿을 길 없어 꺼이꺼이 울 수밖에 없는 삶이, 죽음이 있습니다. 강기훈씨의 연주가 뒤로 숨는 동안 사라진 이들이 하나 둘 걸어나와 살아남은 이들과 만납니다.

김철수는 말합니다. “진실이 무엇인지 하나부터 열까지 생각해 주세요.”

김귀정은 묻습니다. “나는 10년 후에 무엇이 되어 있을까?”

박창수는 꾸짖습니다. “왜 당신들은 아직도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지 못하는 건가요?”

권력에 모든 것을 걸었던 이들은 삶을, 목숨을 짓밟았습니다. 대법원 무죄판결 이후에도 여전히 강기훈의 유죄를 확신한다는 이들은 처세를 이해하고 자신을 높이는 데 성공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삶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강기훈이 말하는 ‘시시함’을 모르고 살아가는, 누군가의 배경이 되는 일의 아름다움을 알 턱 없는 사람들이 응원을 받고, 권력을 잡고,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야만의 시간은 계속됩니다.

이 영화의 제목은 세 개입니다. <1991, 봄>으로 개봉했지만 그 전에는 <국가에 대한 예의>였습니다. 앞서서는 <강기훈 말고 강기타>였죠. 저는 이 세 제목이 우리가 한 사건을 기억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건은 ‘시대’로 기억됩니다. 1980년 5월. 1987년 6월. 1991년 5월. 이렇게 말입니다. 어떤 사건은 ‘상대’로 기억됩니다. ‘국가폭력사건’, ‘간첩조작사건’. 하지만 어떤 사건은 이름을 불러냅니다. 김귀정, 강경대, 박창수, 김철수, 김기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저에게 1991년 봄의 기억은 단순합니다. 대입 모의고사를 치고 학과를 결정하고 열심히 암기과목을 정리하던 시기. 아버지가 가져온 신문에서 검은 신부복 차림의 박홍을 봤던 시기. ‘국가폭력’, ‘유서대필조작’ 등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시기. 김기설, 강기훈의 이름은 알지도 못했던 때입니다.

지금 돌아보면 주어진 삶에 충실했기에 더더욱 부끄러운 시절입니다. 죽음보다 강한, 아니 죽음에 무지했던 일상이 자꾸만 아픈 시절입니다.

이런 어리석음 때문일까요. 영화를 네 번이나 보았지만 제게 남은 것은 <1991, 봄>이나 <국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강기훈의 모습이었습니다. 수술 후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운지가 잘 되지 않던, 딸과 따스한 농담조의 메시지를 주고받던, 예상치 않았던 카메라를 웃으며 나무라던, 도레미파솔라시도 첼로를 연주하던, 등에 딱 붙는 백팩을 메고 진실의 힘 계단을 오르던, ‘유서대필의 누명을 썼던 손가락으로 기타를 연주하던’ 모습 말입니다.

“동료의 유서를
대신 써준 운동권,
국가 폭력 피해자
말기 암 환자

그러나 강기훈은
그를 가리키는
모든 말로부터
걸어나갔다”

국가폭력의 희생자 강기훈이 아닌 자신의 삶을 묵묵히 살아나간 강기타를 기억하려 합니다. 기타에 닿는 그의 눈과 손가락을, 몸짓을 바라보고자 합니다.

언젠가 저도 주어진 말로부터 걸어나갈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카바티나>를 듣습니다.

영어를 위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영어를 위하여

언어는 의미를 만들고 생각을 교환하며 경험을 새기는 도구입니다. 감정을 표현하고 의견을 주고 받으며 행동을 공유하는 수단으로서의 언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모국어이건 외국어이건 언어의 본령은 나와 너를, 더 나아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영어의 역할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언어는 밥벌이의 수단이기도 하고, 사람을 통제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사회적 지위와 교육 정도를 보여주는 지표(index)이기도 합니다. 기업은 일정수준으로 영어를 해야만 취업할 수 있다는 규칙을 제시합니다. 영어가 ‘문지기’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은 ‘세련된’ 느낌을 풍깁니다. ‘네이티브 발음’을 가진 사람들은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지요. 영어가 의사표현의 수단을 넘어 노동을 통제하는 수단이면서 상징적인 자본으로 우리사회에 자리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아가 영어는 여러 종류의 사교육, 테스팅 및 어학연수 시장에서 널리 판매되는 물건이 되었습니다. 사실 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영어교육이 이 정도로 큰 시장은 아니었습니다. 시장확대가 주춤하다고는 하지만 지난 20여 년간 영어사교육 섹터는 놀랍도록 팽창했습니다. 각종 영어학원, 회화 프로그램, 어학 관련 스마트폰 앱 등에 대한 광고를 끊임없이 접하게 되었지요. 이같은 언어의 상품화(commodification of language) 경향은 지식노동이 일반화되고, 물자가 더 빨리 유통되며, 이주와 관광이 늘어나고, 다국적 기업들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언어의 상품화는 금융자본과 서비스 경제의 영향력이 커지고 지식 생태계가 급속히 변화하는 후기 자본주의(late capitalism) 시대의 징후로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더해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뉴미디어가 확산되고 재화를 생산하고 분배하는 방식이 달라지면서 영어를 접할 수 있는 다양한 루트가 확보되었습니다. 이제 ‘영어자료를 구하기 힘들어서 영어를 배우지 못한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게 되었죠. 클릭 몇 번이면 세계 유수의 영어 언론에 접속할 수 있는 상황이니 뉴스위크나 타임을 구독하라고 귀찮게 구는 외판원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고요. 언제 어디에서나 거의 무한대의 영어자료에 접속할 수 있는 상황에서 언어 특히 외국어는 누구나 열심히 하면 습득할 수 있는 도구라는 생각, 영어를 못하는 건 ‘네 잘못’이라는 생각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어의 영향력은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도 예외는 아니지요. 위에서 설명드린 입사를 위한 스펙이나 승진 요건의 역할을 넘어 일상생활에서 보이지 않게 작동하는 것입니다. 영어를 사회문화적 계층을 파악하거나 타인을 판단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경향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어에 과도한 힘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우리는 보통 역사지식이나 100미터 달리기 기록으로 누군가의 배경을 순식간에 판단하지 않습니다. 지도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그다지 큰 관심을 주진 않죠. 심지어 국어 실력도 그다지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영어발음을 듣는 순간 그에 대해 꽤나 많은 것을 ‘알아버리게’ 됩니다. 상대에 대한 은밀한 선입견을 갖게 되기도 하지요. 간단한 사고 실험을 해봅시다. “걔 우리말 정말 잘해”와 “걔 영어 정말 잘해” 중 어느 표현을 더 자주 쓰고 또 접하시나요? 왜 우리는 “걔 완전 네이티브야”라는 말에 모종의 아우라를 덮어 씌우고 있는 걸까요?

뼈아픈 것은 영어에 대한 태도가 외부로만 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우리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영어실력으로 자신의 많은 부분을 판단해 버립니다. “영어도 안되는데…”라며 체념어린 이야기를 하기도 하죠. 현재 한국사회가 영어를 강조하는 만큼 우리 안에서 영어에 대한 갈망이 떠나질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영어의 힘은 사회적임과 동시에 심리적입니다.

이 사회에서 영어는 사회문화적 계층과 특권의 대변인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영어가 삶을 풍성하게 하지 못하고 도리어 척박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영어교육을 오랜 시간 공부하고 가르쳐온 사람으로서 저 자신 또한 이 사태의 희생자이자 방조자라는 생각으로 괴롭습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영어의 ‘덫’에서 빠져나가고 싶다는 소망 뒤에는 이런 괴로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영어가 아니라 가르고 줄세우는 영어, 철저히 물건이 되어버린 영어의 시대. 한국사회에서, 또 우리 안에서 영어가 휘두르는 힘을 정확히 이해하고 다스려야 합니다. 영어를 위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영어가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혼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함께 해야 하는 일입니다.

네이티브 스피커는 죽었다(The Native Speaker is Dead!)

 

원어민이 죽었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세상곳곳에 버젓이 살아있는데 말이죠. 사실 이것은 Thomas M. Paikeday가 쓴 책 제목입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네이티브 스피커’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개념화했다는 겁니다. 마치 유니콘을 만들어 낸 것처럼 말입니다.

영어 원어민(English native speaker)는 누구입니까?

“하, 이사람 보게나. 원어민이 누구겠어. CNN 같은 방송에 나와서 아주 “명쾌한” 발음으로 뉴스를 전해주는 그 앵커들 아니겠어? 영어 교재에 나오는 그 발음 있잖아. 토플이나 토익 보면 문제 읽어주는 사람들.”

아마도 많은 분들이 교육을 잘 받은 미국 중산층 백인 엘리트를 영어 원어민으로 생각하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이른바 “원어민 발음”을 구사하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몇 퍼센트가 될까요? 한국 영어교육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국가인 미국 인구 중에서는 또 얼마나 될까요?

제가 공부를 하기 위해 머물렀던 펜실베니아 주 내에서도 “피츠버그 발음”과 “필라델피아 발음”을 구분해서 이야기합니다. 경제와 문화의 수도라 불리는 뉴욕 내에도 여러 가지 영어가 섞여 있고, 브루클린 지역의 발음은 여러 면에서 특히 독특합니다. 소위 “시골 동네”인 와이오밍과 앨러배마주의 발음은 ‘보통’ 발음에서 거리가 더 멀죠. 유튜브에서 이들 지역의 방언을 검색하시면 그간 들어왔던 미국영어와는 확연히 다른 발음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미국 내에서도 발음의 차이는 현격합니다. 물론 미국이 이민자들의 국가인 만큼 다양한 인종, 문화, 국가를 배경으로 하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발음을 구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한국 교육과정의 근간을 이루는 미국영어를 벗어나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집니다. 미국인 외의 수많은 사람들은 영어 원어민 화자가 아닌가요? 영국인이나 호주인들은 어떨까요? 태어나서 줄곧 영어를 쓴 인도인들은 또 어떻습니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영어의 네이티브 스피커입니다. 교재의 MP3에 등장하는 사람들만 원어민은 아닌 것입니다.

일부 원어민들의 영어를 모델로 삼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영어를 가르치고 배우려면 어느 정도의 표준이 필요하고, 적절한 모델을 따라서 노력하는 자세 또한 필수적입니다. 여기에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스탠다드’와 다른 영어 발음과 문법을 쓰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입니다.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함으로써 다양성이 아닌 배제의 논리로, 평등이 아닌 위계의 논리로 발음을 대하는 건 은밀한 언어차별의 논리에 휘둘리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흑인이나 히스패닉 계열이 쓰는 영어, Texas와 같은 남부 지방 사람들이 쓰는 영어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까? 은연중에 ‘저거 발음이 영 시원찮은데…”라고 생각하거나 “정말 웃기군”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나요? 아일랜드에 가면 아일랜드 사람들의 영어를 들을 수 있고, 홍콩 사람들은 홍콩의 영어를 합니다. 미국 동부 사람들은 그 지방의 특색을 가진 영어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들 사이의 우열관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 사이에 우열이 있다고 믿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주입되어 온 언어 이데올로기의 힘입니다. 우리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울말이 경상도나 전라도말보다 본질적으로 더 나은 것은 없습니다. 다만 사회경제적 구조가 서울말을 하는 사람에게 좀더 많은 기회를 주고 각종 미디어가 서울말을 기준으로 방송을 제작하는 경향이 있기에 ‘서울말이 낫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한국의 영어를 합니다. 이를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발음이라면 한국 억양이 조금 들어간다거나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태교를 해서 원어민과 같은 발음을 갖게 해주겠다는 일부 극성 부모들의 행위도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identity)을 잃어버린 데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사회문화적 토양과 언어를 분리할 수 있다는 만용인 것입니다.

“원어민”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널리 사용되지만, Paikeday의 말대로 ‘죽은’ 개념일 때가 많습니다. 우선 실제로 누가 원어민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사회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위해 만들어진 비현실적이고 애매모호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원어민’ 개념이 사회적으로 힘을 가질 때, 나아가 ‘원어민’과 ‘비원어민’이 명확히 구분되는 상황이 만들어질 때 힘을 갖고 이득을 보게 되는 집단이 존재합니다. 이는 영어 교수학습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정확성과 형식은 과도히 강조하는 반면, 언어학습이 더 깊이 추구하는 목표가 되는 의미와 소통을 등한시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원어민’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글로벌 시대를 정확히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원어민-비원어민 간의 대화보다 비원어민-비원어민 사이의 대화가 더 빈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영어를 모국어가 아니라 국제어(international language)로 배운다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우리는 원어민이 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많은 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공부합니다. 이 점을 기억한다면 필요없는 원어민 콤플렉스나 다양한 발음 및 언어특성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버릴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죽은’ 네이티브 스피커의 영어를 흉내내기 보다는 ‘살아있는’ 우리의 언어를 만들어 갈 때입니다.

#삶을위한영어공부 #초안작성중

바이링궐: 완벽한 이중언어 구사자라는 신화

여러분은 ‘바이링궐’을 어떤 의미로 쓰시나요? 사람마다 기준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제 주변 사람들 대부분은 “태어나서부터 혹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두 언어에 노출되어 두 개의 언어를 막힘없이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더군요. 예를 들어 세 살때 가족과 함께 이민을 떠나 미국에서 15년 쯤 살아서 영어와 한국말 둘 다 유창한 친척 동생은 바이링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면 A씨는 어떤가요? 그는 대학교까지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어서 말할 때 ‘찐한’ 한국 발음이 나오지만 어학 공부를 열심히 해서 회사 업무 대부분을 영어로 처리합니다. 회사 들어간 지 십여 년이 지나니 자기 분야의 비즈니스를 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고, 영어로 프리젠테이션 하거나 협상을 하는 데도 큰 두려움은 없죠. 한 마디로 영어로 먹고 사는 데 큰 지장이 없는 사람입니다.

B씨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해외에서 석사학위 공부를 마치긴 했지만 일상적인 토론이나 술자리 잡담에는 자신이 없습니다. 원어민 친구들이 영어로 유머를 구사하면 당황하기 일쑤고요. (덕분에 타이밍 맞추어 이해한 척 웃는 기술은 수준급입니다.) 하지만 자기 분야에 관해서 읽고 쓰는 능력, 즉 전공과 관련된 리터러시 수준은 상당히 높습니다. 말이 막힘없이 터져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전공과목은 영어로 강의를 해도 할 수 있을만한 실력을 갖췄습니다. 풍부한 내용지식이 제한적인 영어 실력을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상황인 거죠.

한국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바이링궐’은 언어학자들이 흔히 “균형잡힌 이중언어 구사자(balanced bilingual)”라고 부르는 개념에 가깝습니다. 두 언어 모두를 자유자재로 말할 수 있으며, 한쪽 언어가 다른 언어에 비해 압도적으로 뛰어나지 않아 고른 실력을 갖춘 경우입니다. 이렇게 균형잡힌 바이링궐로 발달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조건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아이와 각각의 언어로 소통하는 경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균형잡힌 바이링궐들도 모든 상황에서 두 언어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국어-영어 바이링궐의 경우 초중고교 교육을 대부분 영어로 받았습니다. 학교교육을 영어로 받았으니 공부와 관련된 어휘는 거의 영어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학, 과학, 지리 등의 주제를 이야기해 보라고 하면 100% 영어로 이야기하는 게 쉽다고 합니다. 아니, 한국어로 시키면 더듬거리기 일쑤죠. 그런데 이 경우엔 한국 대학에서 한국어로 쓰기 과제를 제출할 때 어려움을 겪습니다. 영어로 쓰라면 그럭저럭 괜찮을텐데 한국어로는 힘겨운 과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두 언어로 일상적인 소통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고 해도 지식의 영역, 의사소통의 상황에 따라 대부분 한쪽 언어가 훨씬 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당연히 모든 지식에 대해 두 언어로 자유자재로 논할 수 있거나, 두 언어의 코미디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바이링궐의 수는 극소수입니다. 일상적 대화와 교과내용을 두 언어 모두로 알고 있고, 쓰기에 있어서도 두 언어 모두가 편하다면 실로 놀라운 경지인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사회에서 영어를 사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과업을 이룰 수 있는 사람들은 바이링궐이 아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예를 들어 위에서 예를 든 A씨와 B씨는 ‘그냥 영어를 좀 잘 하는 거지 바이링궐은 아닌’ 사람들인 것입니다. 분명 비즈니스와 전공분야의 영어능력은 흔히 말하는 ‘바이링궐’들에 비해 훨씬 뛰어난데도 말입니다.

재미난 것은 오랜 외국 체류로 한국어와 영어 모두를 편하게 구사하지만 한국어 발음이 서툰 사람들을 ‘바이링궐’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영어 발음의 아우라가 강해서 한국어 발음의 어색함을 압도하는 것일까요? 그런 기준을 반대로 적용한다면 한국어와 영어를 구사하되 영어 발음이 조금 ‘서툰’ 사람들도 분명 바이링궐인데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언어능력을 판단함에 있어 영어에 ‘가산점’을 주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저는 많은 이들이 바이링궐을 ‘모든 영역에서 두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현상을 ‘올마이티 바이링궐 오류(almighty bilingual fallacy)’라고 부릅니다. 그야말로 두 언어로 모든 일들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오류입니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또 경험적으로 확실한 것은 두 언어로 모든 일을 척척 해내는 바이링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한국사회에서 ‘올마이티 잉글리시 바이링궐’의 탄생을 바라는 것은 헛된 꿈입니다. 해외체류가 정답도 아니지요.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 위한 이주(migration)에는 떠남의 상처, 현지 적응의 어려움, 언어정체성의 혼란, 사회문화적 토양의 급격한 변화, 사회성 발달의 위기, 귀국 후 정착에서의 어려움 등이 반드시 수반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한국사회에서 바이링궐의 개념이 좀더 기능적으로 정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두 언어의 세례를 골고루 받은 이들만이 이중언어구사자는 아닙니다. 언어를 충실히 공부해서 자신의 영역에서 특정외국어로 다양한 일을 무리없이 해낼 수 있다면 바이링궐이라 불러도 무방한 것입니다. 좀더 많은 분들이 ‘나 영어 못하는데’가 아니라 ‘영어로 이 정도 일하면 됐지 뭘 더 바래’라고 말하게 되길 바랍니다. 존재하지 않는 바이링궐을 부러워하기 보다는 지금 이땅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들의 다언어 능력이 대우받았으면 합니다. 완벽한 바이링궐의 신화를 걷어내고 많은 이들이 ‘다언어 사용자(multilingual)’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갖게 되길 바랍니다.

#삶을위한영어공부 #초안집필중

크랴센을 넘어서, 인풋을 넘어서

크라센의 언어학습이론은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영어는 인풋이다”라는 말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것이 이 이론의 힘이었지요. 이것은 영어교육과 관련된 효율적인 소통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인풋’이나 ‘습득’, ‘이해가능한 입력’등의 용어를 통해 원활한 대화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하지만 인풋이론이 한국사회에 미친 부정적 영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언어교육의 복잡다단한 측면을 ‘인풋’이라는 말 하나로 압축시킴으로써 영어교육에 대한 풍성하고도 깊은 논의를 막은 셈이 되었습니다. 이는 여러 부작용을 함께 가져왔는데 그 중 하나는 몰입교육에 대한 오해입니다.

‘어딘가에 푹 빠진다’는 의미를 지닌 몰입(immersion)교육은 1960년대 캐나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영어와 불어 두 개의 언어를 동시에 배우고 사용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곳이었죠. 그러기에 캐나다에서의 몰입교육과 한국의 몰입교육은 그 맥락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전자가 사회문화적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면 후자는 인풋의 획기적 증대를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다. 균형잡힌 교과 학습을 통한 아동의 지적 정의적 발달보다는 언어입력의 양을 늘리는 데 온 힘을 쓰고 있는 경향을 보이는 것입니다.

한때 많은 몰입교육 프로그램은 미국 초등학교 교과서를 교재로 채택하였습니다. ‘본토 네이티브의 인풋’을 풍부하게 제공한다는 명목이었습니다. 한국의 유치원에서 미국 초등학교 3학년 교과서를 가르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인지적, 정서적 수준이 맞지 않는 내용을 다룰 수밖에 없는 상황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어로 유치원 과정을 배워야 할 아이들에게 외국어로 초등학교 3학년 과정을 가르친 꼴이니까요.

미국 초등학교 교과서가 개정되면 한국의 몰입교육 교사들이 엄청나게 고생한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습니다. 사실 영어로 다양한 과목을 가르치는 게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정규교육과정을 거쳐 초등학교 교사가 한국어로 여러 과목을 잘 가르치는 것도 힘든데, 외국어로 여러 과목들을 제대로 가르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건 당연하지요. 한 교사는 제게 “언어과목은 그나마 괜찮지만 수학, 과학 등의 과목들을 영어로 가르치면 애들은 그야말로 ‘죽으려고 해요’”라는 말을 전해주기도 했습니다.

인풋이 모든 것이라는 믿음은 영어교육과 관련된 논의를 앙상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전인적 성장과 외국어교육, 한국어와 영어 리터러시의 균형적 발달, 한국의 사회문화적 환경에서의 영어의 역할 등에 대한 깊은 고민을 전개하기 보다는 ‘어떻게 언어노출을 늘릴 것인가’라는 질문에 매달리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기반 위에 어려서부터 최대한의 인풋을 ‘넣어주어야만’ 네이티브와 비슷한 영어실력을 가질 수 있다는 마케팅 담론이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인풋”과 “네이티브되기”라는 두 축이 다양한 논의를 삼켜버린 시대. ‘삶을 위한 영어공부’가 아니라 ‘입력의 최대화를 위한 영어훈련’이 화두가 되어버린 듯합니다. (계속)

#삶을위한영어공부 #초안집필중

대화의 세 가지 차원에 관하여.

Posted by on Nov 9,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집필 | No Comments

먼저 대화의 일반적인 의미다. 네이버 사전에는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음. 또는 그 이야기”라 풀이되어 있으며, 한자로는 “對話”로 표기된다. 대화對話에서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이야기한다. 말들이 서로에게 날아가고 날아든다. 대화참여자 A와 B는 개인으로 표상된다. 이 개념에서는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 자주 사용되는 A <-> B 도식이 적당할 것이다.

두 번째는 대화代話라고 표기해야 할만한 측면이다. 대신해서 말한다는 뜻. 사회적인 측면에서의 이야기는 나와 너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나의 역할과 너의 역할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저기 보이는 저 분은 <보험영업원>으로 <고객>에게 이야기한다. 나는 <선생>의 입장에서 <학생>에게 이야기한다.

인지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주어진 사회적 역할 속에서, 혹은 사회가 정해준 역할을 대신해서 서로에게 이야기한다. 대화 참여자 A와 B는 사회적 역할 A’와 B’가 자신을 실현하는 통로다. 구조는 ‘에이전트’를 통해 세계에 등장한다. A’-A<->B-B’ 정도로 도식화할 수 있다.

세 번째는 대화大話라고 부를만한 것이다. 이것은 첫 번째의 대화對話와는 다르게, 방향성이 없다. 나의 말이 너에게로 향하거나, 너의 말이 나에게로 향하지 않는다. 너와 나는 서로를 도와 대화大話를 만들어가는 존재다.

H와 O는 각각의 특성이 있지만 H2O가 될 때는 본질적인 변화를 겪는다. 나와 너는 각자 말하는 것 같지만 속에서 본질적으로 다른 이야기 즉, 대화大話를 만들어 낸다. 처음에는 A와 B로 존재했던 사람들이 이야기 속에서 C가 된다. ‘나’와 ‘너’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가 생성되는 것이다. A+B=C (C>A+B) 가 되는 셈이다.

카페 구석에서 대화에 깊이 빠져든 이들을 본다. 미소는 떠나질 않고 말은 끝없이 이어진다. 가끔 눈물을 글썽이기도 한다. 너의 말은 나의 말이 되고, 나의 말은 너의 말이 된다. 누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같은 시공간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때 그들만의 시공간이 생성된다. 물리적으로는 탁 터진 공간이지만 대화를 통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고, 스마트폰이 가리키는 시간과는 다른 시간을 여행하는 것이다.

代話를 집어던지고
對話를 넘어
大話가 되어버린 사람들.
아름답고 신비하다.

<닥터 후>의 대사 한 토막이 기억난다.

“We’re all stories, in the end. Just make it a good one, eh?” (우리는 결국가서 모두 이야기로 남는 거잖아. 그러니 괜찮은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 어?)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학부생을 위한 근거이론 이야기 (6) –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이야기들

Posted by on Nov 6, 2018 in 강의노트, 수업자료, 집필 | No Comments

본격적으로 코딩에 들어가기 전에 Strauss & Corbin (1990)에 기반해 몇 가지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데이터 코딩에 함몰되어 아래 이야기들을 지나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근거이론을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 근거이론의 ‘근거’가 되는 이론 두 가지는 실용주의와 상징적 상호작용이론입니다. 사실 이 두 가지 이론을 설명하는 것은 너무 큰 일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2. 근거이론이 다른 질적연구방법론과 갈라지는 부분 중 데이터 수집과 분석의 시차가 있습니다. 근거이론에서는 수집과 분석이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데이터가 들어오면 바로 분석을 하고, 이 분석이 추후의 데이터 수집과 분석을 이끌게 됩니다. 수집과 분석의 유기적 결합은 연구자로 하여금 세계에 대하여 열린 자세를 갖게 함과 동시에 ‘미리 정해 놓은 문제’가 분석과정에서 편향을 갖지 않도록 돕습니다.

3. 여러 학자들이 혼용해서 쓰고 있는 용어로 개념(concepts)과 범주(categories)가 있습니다. 적어도 Strauss & Corbin에게 있어서는 범주가 개념의 상위 범주입니다. 이 수업에서는 이 용례를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4. 근거이론의 기본 분석단위(unit of analysis)는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 원자료 자체를 분석하기 보다는 자료에서 추출한 개념을 가지고 이론을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를 분석하지만 세계를 있는 그대로 분석하지 않습니다. 사실 ‘있는 그대로’를 기술하고 분석한다는 것은 추상적 이론의 생성을 포기한다는 말과 같지요.

5. 개념을 모아놓는다고 범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컨텐츠 분석과 다른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상적인 개념은 그것이 갖는 속성들(properties)과 차원들(dimensions), 그것이 일어나게 하는 조건들(conditions), 그것에 의해 표현되는 행위와 상호작용(actions/interactions), 나아가 그것의 결과(consequences)에 근거하여 개발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분석할 데이터가 작아서 이점을 깊이 이해하긴 힘들겠습니다만, 개념을 묶어놓는다고 범주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6. 이론적 샘플링은 인구분포나 대상집단의 특성을 기준으로 하지 않습니다. 이론적 샘플링의 근거가 되는 것은 5번에서 말씀드린 개념입니다. 연구자는 개념을 따라 샘플링을 하는 것이지 ‘여성이 두 명 모자라니 두 명의 여성을 더 인터뷰하자’든가, ‘연령이 치우쳐져 있으니 이번에는 50대에와 서면 인터뷰를 진행하자’는 결정을 하진 않습니다. 근거이론 샘플링에서 가장 많이 오해되는 것이 바로 이 부분 아닐까 합니다.

7. 다시 말해 근거이론에서 전체 현상을 대표하는 것은 대상 인구집단의 특성이 아니라 개념의 특성입니다. 중심개념의 다양한 측면들을 밝히 보여주어 이론화에 도움을 주는 샘플링이 필수입니다.

8. 근거이론의 방법론적 특징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끊임없는 비교(constant comparison) 기법입니다. 데이터 내에서 하나의 사건은 다른 사건과 비교됩니다. 어떻게 비슷하고 어떻게 다른지를 꼼꼼히 살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온 개념과 범주는 언제나 한시적(provisional)인 것으로 인식됩니다. 다른 데이터를 통해 새롭게 조명되고 변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의 데이터라 하더라도 특정 현상 초반과 후반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A의 변화 패턴과 B의 변화 패턴을 비교할 수도 있습니다. 데이터 분석이 쌓이고 개념과 범주가 추상화될수록 비교의 수준도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쪽으로 진화합니다.

9. 데이터에서 나타나는 패턴과 변이를 설명해 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왜’라는 질문과 짝을 이루고 있지요. 이에 잘 대답할 수 없다면 더 많은 데이터 분석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데이터를 보면서 ‘왜’라는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지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10. 과정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근거이론의 기본 가정 중 하나는 사회현상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변화는 일련의 과정을 낳게 되죠. 데이터를 대할 때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고 묻는 것만큼 “여기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11. 이 모든 것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메모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모든 데이터에 동시에 접근하여 이를 처리하고 해석하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을 기억한다면 연구의 과정 내내 이론을 발전시켜 나갈 전략을 궁리하고 이를 꼼꼼한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논문을 쓰실 일이 없으니 메모를 비교적 간단히 쓰시면 되겠지만, 원칙적으로는 심도있는 메모를 쓰는 것을 권합니다. 연구자가 데이터와 씨름한 흔적은 오롯이 메모에 담겨 있어야 합니다.

자 이제 드디어 진짜 데이터 코딩에 들어가 보겠습니다. :)

참고자료
https://med-fom-familymed-research.sites.olt.ubc.ca/files/2012/03/W10-Corbin-and-Strauss-grounded-theory.pdf

#학부생을위한근거이론이야기

단어공부의 원칙들 (2): 기본의미와 확장의미를 함께 고려하세요!

 
단어 공부의 첫 번째 원칙이 짝궁을 함께 기억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원칙은 단어의 의미를 깊게 아는 것입니다. 첫 번째 원칙이 단어들 사이의 어울림에 관한 것이라면 두 번째 원칙은 개별 단어의 ‘내면’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어 안으로 한걸음 더 들어가 보는 것입니다.
 
제가 “run”을 아느냐는 질문을 던진다면 대부분이 그렇다고 대답하실 겁니다. ‘달리다’ 또는 ‘운영하다’라는 뜻을 언급하시면서 말이죠. “그 단어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라고 반문하시는 분이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안다”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 추산에 따르면 동사 run은 영어에서 가장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 가짓수가 600개를 훌쩍 넘는다고 합니다. (동사 set이 그 뒤를 따른다고 하네요.) 이 중에는 다음과 같은 용법이 포함됩니다.
 
The bus runs twice a day. (그 버스는 하루에 두 번 운행한다.)
Tears ran down his cheek. (눈물이 그의 뺨으로 흘러내렸다.)
“Two killed in car accident,” ran the headline. (헤드라인은 “자동차 사고에서 두 명 사망”이라고 되어 있었다.)
 
이런 세세한 예들을 모두 포함한다면 우리는 ‘run’이라는 동사를 알고 있다고 하기 힘들 겁니다. 수박 겉핥기 식으로 알고 있다고 하는 게 맞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동사 “run”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의미 외에 추가적인 의미를 고려하여 학습해야 합니다.
 
예전에 고교 독해를 지도하면서 단어학습을 위한 과제를 고안한 적이 있습니다. 학생들로 하여금 독해지문에 나오는 단어를 정리하되 다음 가이드라인을 따르도록 한 것입니다.
 
단어를 정리하는 방법: 먼저 단어를 쓴 뒤 (1)에는 지문에 나온 뜻을 쓰고, 지문에 나온 문장을 그대로 옮겨 씁니다. (2)에는 (1)에 나온 의미를 응용하여 영작한 문장을 적습니다. (3)번에는 사전을 찾아 지문에서 쓰인 의미와 다른 의미를 찾아 뜻과 예문을 적습니다. (4)번에는 (3)번의 의미를 활용하여 영작한 문장을 적습니다.)
 
학생들은 이 과제를 통해 자신이 배운 단어를 다시 한번 복습하고 해당 단어의 새로운 의미를 공부합니다. 각각의 의미를 기반으로 영작을 해봄으로써 단어를 실제로 활용할 기회 또한 갖게 됩니다. 이를 통해 단어의 다의성 즉, 한 단어가 여러 개의 뜻을 갖고 있음을 인지하고 추후 단어 학습시에도 이 점에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일상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들은 대개 여러 개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전에서 단어를 찾아보고 ‘왜 이렇게 뜻이 많아’라고 생각해 보신 경험이 다들 있으실 겁니다. 즉, 다의성은 예외적이라기 보다는 언어 전반에 퍼져있는 현상입니다. 한국어건 영어건 불어건 그 어떤 언어도 예외가 없죠. 그렇다면 이처럼 다양한 뜻을 가진 단어들을 좀더 효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여기에서 단순하지만 효율적인 방식 한 가지를 제안드리려 합니다. 바로 ‘기본의미’와 ‘확장의미’를 긴밀히 연결하여 암기하는 방식으로, 다음 공식(formula)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단어의 기본의미는 A다. 하지만 OOO과 연관되어 쓰이면 B라는 의미를, OOO와 연관되어 쓰이면 C라는 의미를 갖는다.”
 
구체적인 예 몇 가지를 보시죠.
 
(1) 동사 throw는 ‘던지다’라는 기본의미를 갖습니다. 하지만 타인을 향한 태도나 행위와 관련되어 쓰이면 ‘(의심, 비난, 의혹 등을) 제기하다, 퍼붓다’의 의미가 되고, 성격과 관련된 목적어를 취하면 ‘(성질을) 부리다, (성격을) 발산하다’와 같은 뜻이 됩니다. 예를 들어 ‘throw accusations at the government’라고 하면 ‘정부에 비난을 퍼붓다’라는 뜻이 되고, ‘throw tantrums very often’이라고 하면 ‘매우 자주 성질을 부리다’라는 뜻이 됩니다.
 
(2) 형용사 round는 ‘둥근, 원형의’라는 기본의미를 갖습니다. 하지만 숫자와 관련되어 쓰면 ‘대략적인, 어림잡은’의 의미가 되고, 목소리와 관련해서는 ‘풍성한, 부드러운’의 의미가 됩니다. 예를 들어 ‘The size is given in round numbers.’라고 하면 ‘크기는 대략적인 수치로 주어진다’라는 뜻이, ‘She has such a round voice.’라고 말하면 ‘그녀는 굉장히 풍성한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3) 명사 hit은 ‘때리기, 타격’이라는 기본의미를 갖습니다. 하지만 유행과 관련되어 쓰면 ‘인기작, 흥행작’의 뜻이 되고, 마약이나 약물과 연관하여 사용하면 ‘1회 투입량’의 의미가 됩니다. 예를 들어 ‘The film was not a hit but mesmerized its viewers.’라고 하면 ‘그 영화는 흥행하진 못했지만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뜻이 되고, ‘The man said he would need another hit soon.’이라고 말하면 ‘그는 곧 마약을 한번 더 맞아야 한다고 말했다.’는 뜻이 됩니다.
 
이와 같은 암기법은 언어의 의미가 사회문화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확장되어 나가는 원리에 부합합니다. ‘Run’이 달린다는 본래의 의미에서 기업을 운영하거나 소프트웨어를 구동시킨다는 의미로 영역을 확장한 것은 사람들이 새로운 맥락에서 기존의 언어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쳇말로 사람들은 ‘갖다 붙이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죠. 그렇기에 신체의 움직임과 관련된 ‘run’의 원래 의미를 다른 맥락 (회사운영, 컴퓨터 프로그램 실행)에 적용하여 새로운 의미를 탄생시키는 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휘 의미의 확장에 숨겨진 이러한 원리를 단어공부에 활용하면 해당 단어를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Run’을 ‘달리다’로 아는 것을 넘어 run이 가지고 있는 여러 의미들을 알게 될 때 run을 ‘진짜로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단어의 내면을 좀더 깊이 살펴봄으로써 단어를 공부하시는 것은 어떨까요?
 
결론적으로 짝궁단어를 익힘으로써 단어의 친구들과 알고 지냄과 동시에, 단어의 기본의미와 확장의미를 함께 고려하여 개별 단어와 더욱 친해짐으로써 더욱 넓고 깊은 단어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삶을위한영어공부
#초안작성중

‘양심적’ 병역거부

Posted by on Nov 3,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적지 않은 분들이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용어에 반감을 보입니다. 종교와 신념에 기반한 병역거부가 ‘양심적’이라면 군대에 갔다 온 자신은 ‘비양심적’이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논쟁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럴 능력도 되지 않고요. 다만 제가 ‘양심적’이라는 말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생각해 보려 합니다.

많은 분들은 이해를 못하시겠지만 (그리고 저 또한 조금 이해가 안되는 구석이 있지만) 저는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별다른 거부감을 느낀 적이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니, 용어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행위와 그 행위의 주체에 주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람이라면 분명 양심에 기반해서 결단을 내렸을 거야’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저는 오태양 님의 병역거부 이후로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여호와의 증인을 포함한 몇몇 병역거부자들을 멀지 않은 곳에서 만났고, 병역거부 운동을 활발히 하는 이들과 대화할 기회 또한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 병역거부 사례를 접하면서 그들의 행동이 진실한 마음과 평화에 대한 신념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개념이나 용어가 아니라 한사람 한사람의 구체적 삶으로 병역거부를 접한 것이지요. 그렇기에 그들의 ‘양심’이 그들의 행동을 이끌었음을 큰 의심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돌아보면 이런 경험들을 통해 제가 깨달은 것은 ‘양심’이 다양할 수 있으며, 그러한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가 더욱 건강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양심의 다양성이 확보되는 것이 우리사회에 축복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들의 행위를 ‘양심적 병역거부’라고 부르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행위를 양심적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제가 비양심적이 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저 이 사회가 포용할 수 있는 양심의 범위가 확장되는 것 뿐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히려 ‘양심’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기를 마다 않는 그들에게 박수를 쳐야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그들은 우리의 정신이 살아 숨쉴 수 있는 사상의 공간을 넓혀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사회가 어떤 용어를 택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양심의 최전선에서 양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힘써온 분들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낍니다.

양심적 병역거부로 비양심적인 우리가 된 것이 아닙니다. 양심적 병역거부로 더 큰 양심을 품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회가 된 것입니다.

‘그게 왜 양심이냐’라는 질문보다는 ‘여태껏 왜 우린 그 정도 양심밖에 가지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이 더욱 절실합니다. ‘그럼 나는 비양심적인가?’보다는 ‘나 또한 미약하게나마 양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라는 질문이 훨씬 생산적입니다. 적어도 제겐 그렇습니다. 그래서 더욱 넓고 깊어진 이 사회의 양심의 생태계가 벅차게 반갑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양심적입니다. ‘거짓양심’을 판단하는 것, 병역거부자의 선택에 따른 길을 열어주는 것은 법과 제도의 몫입니다. 사상과 제도는 이렇게 조금씩 나아갑니다. 그 앞에는 자신의 양심을 꺾지 않았던 수많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더 이상의 무고한 희생이 나오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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