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말 대잔치

Posted by on Jul 21, 2017 in 강의노트,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1. Literally는 ‘말 그대로’이지만 비유적으로 사용될 때가 더 많은 듯하다.

예: “It literally killed me.” (<-안죽고 살아서 신나게 말하고 있음.)

2. ‘아무말 대잔치’를 제목으로 한 글들은 대개 읽을만하다. 아무말 대잔치는 진지하게 쓴 글 중에서 더 자주 발견된다.

3. 유명인의 아무말 대잔치는 아무댓글 대축제로 급속히 발전한다.

4. “진실로”를 반복 사용한 수사 중에 예수의 말씀 빼고 쓸만한 얘기가 별로 없는 거 같다.

5. “It is true but…”, “I’m sorry but…” 등의 어구에서 “but”이 나오는 순간 앞의 ‘true’와 ‘sorry’의 가치는 땅에 곤두박질친다.

But은 진실이나 미안함보다 힘이 세다.

6. 내일 지방 강의가 있다. 진짜로 진짜로 자러 가야겠다.

새학기 준비

Posted by on Jul 20, 2017 in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 시간이 흐를수록 학생의 이름도 얼굴도 모르고 흥미나 관심, 수준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16주 수업의 개요와 읽기자료, 과제 및 평가방법까지 모두 정해야 한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 두어 명의 중학생 친구들과 3년 여를 만나면서 제일 좋았던 것은 그날 그날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 물론 학생수가 적었다는 게 컸습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상호 신뢰의 관계를 쌓을만한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 대학에서의 만남은 대개 강의계획서와 함께 시작됩니다. 첫 시간에 가장 많이 나오는 질문은 배움의 내용과 방향이 아니라 과제와 시험, 평가 기준에 대한 것입니다.
 
. 현재의 대학교육 체제에서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 하지만 자연스럽다는 게 바람직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 빈틈없이 짜여진 강의요목과 완벽한 변주로 흘러가기 – 이 둘 사이 어딘가에서 중심을 잡아야만 하겠습니다.
 
. 아직도 서툰 것은 이런 접근법을 ‘객관적’이어야만 하는 상대평가 구조에 통합하는 일입니다.
 
. 이번 학기에도 새로운 강의가 많습니다. 얕디 얕은 응용언어학/영어교육학 지식의 팽창은 계속되겠네요.
 
. 고민한다고 될 일이 아닌데 고민이 됩니다.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게 많습니다.

숭고함

Posted by on Jul 18,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반듯이 구별되진 않지만 약자가 자기 편인 사람이 있고, 자기 편이 ‘약자’인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둘다 약자를 위한다 믿고 살아가지만, 약자로서 약자를 섬기는 이들과 강자의 위치에서 강자를 키우려는 이들의 차이는 작지 않다. 영원히 약자로 남을 수 있는 강인함은 고통과 단련을 요구하지만 ‘숭고함’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단 하나의 성품 아닐까.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성평등 인권교육

Posted by on Jul 17, 2017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해마다 돌아오는 교직원 대상 성평등 인권교육. 예전에는 뻔하고 지루해서 힘들더니 이젠 날것 그대로의 묘사가 사뭇 고통스럽다. 운좋게 폭력을 비껴 살아온 나도 이렇거늘 폭력을 경험했거나 위험에 상시 노출된 이들은 어떨까? 성’평등’ 교육이니 모든 이들이 동일한 내용의 교육을 받는 것을 당연히 여겨야 할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끔찍한 상처를 헤집어야만 하는 이들이 있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손편지와 전자우편

Posted by on Jul 16, 2017 in 강의노트, 단상, 링크, 수업자료 | No Comments

‘우편, 편지’를 의미하는 영단어 mail은 고대 프랑스어 male에서 온 것으로 초기에는 여행 가방을 의미했다. 이후 우편제도의 발달에 따라 ‘우편물’ 혹은 ‘편지를 부치다’등의 뜻으로 진화했다. 20세기 후반에 대중화된 e-mail은 ‘전자우편’이라는 뜻의 electronic mail의 준말이다.

편지가 이메일이 된 것은 전달의 매개 즉 미디엄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우편배달에 있어 궁극의 퀵서비스가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전달방식’으로만 이해한다면 전자우편 기술의 반쪽만을 보는 결과를 낳는다.

이메일은 메시지의 전달방식(delivery method) 뿐 아니라 정보의 저장방식(archiving method)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편지는 정보를 담은 물체가 공간이동을 하지만, 이메일은 정보를 복제하여 상대와 공유한다. 편지는 내 손을 떠나 보내는 것이 맞지만 이메일은 실상 나에게도 너에게도 보내는 것, 즉 ‘카피 앤 페이스트’하는 것이다. ‘이메일을 보내시겠습니까?’라는 말은 ‘이메일을 복사에서 홍길동의 메일 서버에 붙이겠습니까?’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동일한 디지털 정보를 두 사람이 갖게 되는 사태는 물성을 지닌 편지가 받는 사람의 소유가 되는 사태와 사뭇 다르다. 편지라는 미디어는 정보 및 그 담지자(carrier)의 비대칭성을 특징이지만 이메일은 정보의 대칭적 소유가 특징이다. 이런 의미에서 “SEND” 버튼은 “GIVE & TAKE” 아니, “TAKE & GIVE” 버튼이다. ‘보내기’ = ‘나 한부 갖고 너 한 부 갖자.’

편지를 보내는 순간 나에게서 떠난다. 사라지는 편지라야 진짜 편지라는 말이다. 이메일은 보내는 순간 나에게도 남겨진다. ‘보낼 편지함(미래)’에서 ‘보낸 편지함(과거)’로 이동하지만 여전히 내가 쥐고 있는 상황은 지속된다. 동일한 메시지를 담는다 하더라도 편지는 ‘사라짐의 미디어’이고 이메일은 ‘남겨짐의 미디어’랄까.

손편지를 쓰다가 뭐 이렇게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노트 필기였다면 이렇게 장황하진 않았을 거다.

숙제를 할 시간

Posted by on Jul 16, 2017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일전에 언급했듯이 맘고생을 좀 심하게 한 수업이 있었다. 바보같은 두려움이 수업을 잡아먹었고, 몇몇 학생들에게 실망감을 안겼다. 연신 돌아보는 걸 보면 상처가 아직 다 아물진 않았나 보다.

처음부터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응용언어학 전공자로서는 드물게) 해당 분야에서 실무자로 일했고, 프로그램 기획, 구축, 실행, 평가의 사이클도 여러 번 돈 경험이 있었다. 해될 것이 없는 자산이었다.

두려움이 엄습한 것은 몇몇 학생들이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평가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분명 강사로서 수업상황에서의 권력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매번 면접관들 앞에 선 기분이었달까. 몇몇의 항의성 이메일과 거침없는 코멘트 속에서 느껴지는 태도를 요약하면 이거였다.

‘그래 너 얼마나 잘 하나 보자.’

가르치는 일을 하는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의 찌질한 트라우마를 차분히 들은 친구가 입을 열었다.

“요즘 친구들이 그런 경향이 좀 있는 것 같아. 얘네들이 어렸을 때부터 인강을 듣고 자랐잖아? 그러니까 유명한 강사라도 좀 보다가 ‘아니네’ 하면 다른 강사, 또 ‘아니네’하면 다른 강사. 이렇게 선생을 골라가면서 공부한 세대거든. 그리고 고등학교 때나 학원 같은 데서도 무기명으로 평가를 해. 그때 마음에 안드는 게 있으면 자기 감정을 여과없이 다 쏟아놓기도 하지. 그러니까 선생을 고르고 평가하고 여차하면 ‘버리는’ 데 익숙해지는 거야. 그냥 어렸을 때부터 죽 해왔던 일이라 너무 자연스러운 거지. 너 개인에 대한 태도라기 보다는 그렇게 자라온 걸 거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게 다는 아니겠으나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수업을 맡고 그들과 마주하면 구조탓을 할 수는 없다. 결국 내가 감당해야 할 일. 손쉬운 해결책은 없다.

숙제를 해야 할 시간이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야지!

Posted by on Jul 15, 2017 in 단상, 링크 | No Comments

“그래서 하고 싶은 게 뭐야? 정말 하고 싶은 걸 찾아야지.”

세월의 밑바닥에 켜켜이 쌓인 회한이 또다시 이루지 못할 꿈의 탄생을 재촉한다. 듣는 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는다고 해도 꿈을 찾으라는 충고 때문은 아닐 것이다.

모두를 위한 영어교육학 강의 (1) – 언어학습? 언어습득? 언어구축?

Posted by on Jul 15, 2017 in 강의노트, 삶을위한영어공부 | No Comments

외국어를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과정과 관련해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동사는 아마도 ‘학습하다’와 ‘습득하다’일 것이다. (외국어를 학습/습득하다; learn/acquire a foreign language) 실생활에서는 구별 없이 쓰기도 하지만 개념적으로 보았을 때 약간 다른 함의를 가지고 있다.

학습(learn)은 무난한 표현으로 가장 널리 쓰인다. 이에 비해 ‘습득’은 미묘한 함의를 담고 있어 언어학습에 대한 생태학적 접근(ecological approach)을 추구하는 소수 학자들에게는 피해야 할 동사로 인식되기도 한다. 왜 그럴까?

습득(acquisition)은 (1) 외부에 있는 것들이 내부로 들어와서 (2) 자신의 소유가 된다는 함의를 지닌다. 경영학에서의 인수합병(M&A(Mergers & acquisitions)을 생각하시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직역은 ‘합병인수’인가? ^^)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정보가 개인의 소유가 된다는 관점은 서식처(habitat)와 어포던스(affordances)를 강조하는 생태적 접근과 충돌하는 것이다.

이를 비판하며 제시된 대안적 개념으로는 참여(participation)가 있다. 여기에서는 언어를 소유물로 보고 이를 습득하는 것으로 파악하기 보다는 특정 커뮤니티의 일원이 되는 과정으로 파악한다. 즉, 외국어를 배우는 일은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코드들을 습득하는 과정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문화적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일이다. ‘합창의 기술을 습득한다’와 ‘합창단의 일원이 되어 활동한다’라는 두 명제를 비교하면 ‘습득 vs 참여’라는 관점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인지언어학을 공부하면서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언어를 창조 혹은 구축한다’라는 개념이다. 이는 막스플랑크 연구소에서 영장류 연구를 이끌며 용법기반 언어습득을 연구하는 마이클 토마셀로의 역작 <Constructing a Language>의 제목이기도 하다. 학부생 한 명과 나누었던 대화 한 토막을 살펴봄으로써 “언어의 구축”이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

나: “그러니까 문자를 아직 안배운 아이들을 생각해 봐요. 주변 소리를 모방해서 “가(go)”, “감(persimmon)” 같은 것을 발음하면서 두 단어 모두 ‘가’를 포함하고 있고, 다른 단어들에도 /ㄱ/, /ㅏ/, /가/ 소리가 반복해서 등장한다는 것, 나아가 /가/가 자음 ‘ㄱ’과 모음 ‘ㅏ’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할 수 있죠. 이런 점들을 인지하지 못하면서도 발음을 해낼 수 있어요.”

학생: “발음을 할 수 있는데,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죠?”

나: “특정한 발음을 할 수 있다고 해서 그 발음이 자음과 모음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거든요. 성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이해가 안될 수 있지만,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들이 분절음의 체계적인 조합으로 단어가 이루어진다는 걸 깨닫는 데는 시간이 필요해요. 문법적인 규칙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고요.”

학생: (연신 갸우뚱대며) “그렇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을까요?”

………..

언어학습 이론을 공부하면서 흔히 나타나는 오류를 보여주는 듯한 장면이다. 아이들이 ‘성인의 언어, 나아가 ‘성인이 이론적으로 체계화해놓은 언어”를 배운다고 생각하는 것 말이다. 이는 아동의 언어습득과정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우리는 대개 아이들이 언어를 습득한다(acquire a language)고 표현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른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다양한 커뮤니티에 참여(participation)하면서 언어를 구축(build/construct a language)하고 있다. 다시 말해 언어는 성인에게서 아이들에게로 전달(transfer)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다양한 의사소통적 상황을 경험하면서 창발(emerge)한다.

이미 언어습득을 마친 성인의 입장에서 보면 성인언어가 언어학습의 최종 목적지인 듯하다. 하지만 아이들은 언어습득을 위한 최소한의 생물학적 기제(architecture)만을 장착하고 있을 뿐어떠한 설계도도 갖고 있지 않다.

아동의 언어발달은 주어진 최종 설계도에 따라 집을 짓는 일이라기 보다는, 설계와 시공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성인이 보는 언어체계의 광대한 지도를 아동들이 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래도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질 수밖에 없다.

다른 용무 때문에 내주를 기약했으니, 다음 수업이 끝나고도 학생이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나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 이걸 이해 못시킬 수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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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습은 단지 습득을 의미하지만은 않는다. 언어는 (실제적/상상적) 커뮤니티에 참여하는 일이고, 새로운 체계를 구축하는 일이기도 하다.

#모두를위한영어교육학강의

‘시점’ 단상

Posted by on Jul 12,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전지적 작가 시점’이란 말은 좀 이상하다. 개념상 ‘전지’와 ‘시점’이 충돌한다.

‘작가 관찰자 시점’은 좀 으스스하다. 어디든 따라가서 엿보고 엿듣는 것 같아. 스토킹도 아니고.

‘1인칭 주인공 시점’은 불가능하다. 내가 주인공일리가 없잖아.

‘1인칭 관찰자 시점’은 음… 그게 객관화가 되냐고요.

2인칭 시점은 ‘1인칭 거울 시점’이 아닐까. 상대가 주인공 같지만 자신의 마음에 비친 자기 버전의 인물일 뿐이니.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할머니 생각

Posted by on Jul 11,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할머니는 ‘밥하는 아줌마’로 수십 년을 사셨다. ‘권문세가(權門勢家)’라고 불릴만한 집이었지만 쥐꼬리만한 벌이였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민주주의 사회라는 외연 속에 사실상의 노예제가 횡행하던 시절, 보상도 감사도 받지 못하고 평생 누군가를 살리는 밥을 짓기 위해 삶을 송두리째 유보해야 했던 이들이 있었다.

흔히 식모(食母)라고 불렸던 그들. 누군가에게 ‘부엌데기’였을지 모르지만 내겐 밥하는 어머니였고 할머니였고, 사회를 떠받치는 노동자였다. 적지 않은 이들의 성공은 말 그대로 그들이 잘 차려준 상에 숟가락 하나 얹은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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