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관사가 어려운 이유

관사체계가 발달하지 않은 한국어 화자에게 영어 관사가 어려운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허나 영어교육의 문제도 간과할 수 없죠. 관사는 개념적으로 상당히 복잡하여 이해가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잘 풀어서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많지 않습니다. (적어도 제 경우에는 한 분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려우면 더 쉽게 정리해서 명확히 가르쳐 주셔야 하는데, ‘어차피 안되니까’, ‘차차 공부하다 보면 실력이 늘고, 실력이 올라가면 이해가 될테니까’라며 대충 얼버무리는 것이지요. 사실 이런 자세는 될대로 되라는 식에 가깝습니다. 요즘은 분명 좀 나아진 것 같지만 제 경험상 관사 교수법은 엉망이었습니다.

재미난 건 영어에서 가장 빈번히 나오는 품사 중 하나가 관사이고, 단일어로는 the가 빈도수 1위를 늘 차지한다는 점입니다. 관사의 바다 속에서 관사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등잔 밑이 어두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죠. 학술논문 강의를 하면서 관사가 가장 어렵다는 말씀을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관사공부중
#공부안하고알수있는건없다

the very man / the tallest girl (아래 아래 글에 이어서)

정관사의 가장 큰 임무는 ‘특정하는 일(to specify)’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특정하는 역할을 하는 형용사의 경우 정관사가 붙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

대표적인 것으로 두 가지 예를 살펴보자. 먼저 ‘the very man’이다. 주지하듯 ‘very’는 보통 부사로 쓰이지만 형용사로 ‘바로 그’, ‘다름아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바로 그 남자’를 나타내는 표현은 ‘the very man’이 되어야 한다. Very의 개념 자체에 특정의 요소가 담긴 것이다.

Very가 부사로 쓰일 때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A very clever man’이라는 표현을 보면 ‘very가 아니라 ‘clever’가 man을 수식한다. 따라서 “매우 영특한 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되므로 부정관사 “a”가 쓰이는 것이 자연스럽다. (영어 공부를 어느 정도 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의외로 초중생 수준에서는 이런 설명도 가치가 있다.)

형용사가 자연스럽게 특정 대상을 가리키게 되는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최상급이다. 최상급은 개념상 “가장 ~한”의 뜻을 갖는다. 세상에 이것 저것 개체가 많은데 그 중에서 가장 …한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의미 자체가 뒤에 나오는 명사를 특정(콕 짚어서 말함)하게 된다. 이 앞에 정관사 the가 나와야 함을 개념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the tallest girl은 한 명이다.)

“the very 명사”나 “최상급 앞에는 the”라는 설명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좀더 깊이 들어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의미적 특성을 설명해 주는 것이 좋다. 인지적이고 개념적인 기반을 깔아주고 언어 표현을 올리는 것과 그냥 언어표현을 암기하도록 하는 것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음을 명심했으면 한다.

#관사공부중
#관사강의나만들어볼까

Understanding something vs. an understanding of something

아래 OO님의 답글처럼 ‘셀 수 없는 명사와 셀 수 있는 명사’를 기계적으로 구분하고 이를 부정관사 사용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명사와 관사의 관계는 생각보다 유연하기 때문입니다. 언급하신 understanding을 예시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Understanding something은 말 그대로 ‘무언가를 이해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 표현에는 어떤 관사도 붙어 있지 않죠. 무관사는 절대적인 일반화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냥 막연히, 일반적으로 “무언가를 이해하는 일”을 뜻합니다.

이에 비해 “an understanding of something”은 여러 가지의 이해(multiple ways of understanding)가 있음을 상정하고 이 중 하나의 이해방식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수학의 분야 중에 위상수학(topology)이 있습니다. 제 짧은 지식으로는 수학의 하위 분야 중에서 꽤나 어려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깊이 파고들면 뭐 안 어려운 게 있겠습니까만 암튼.) 이를 가지고 두 예문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Understanding topology is not easy. (위상수학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지.)

She proposed a new understanding of topology. (그녀는 위상수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안했다.)

먼저 관사가 쓰이지 않은 “Understanding topology”는 막연하고 일반적으로 “위상수학을 이해함”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후자의 understanding 앞에는 an이 붙어 있지요. 이는 위상수학에 대한 다양한 이해법이 있고 이중 한 가지 이해방법임을 의미합니다.

다만 ‘an understanding of something’에 비해 understandings의 빈도는 심히 낮습니다.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봐야죠. 이는 인간의 개념화가 일어나는 지형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해하는 방식’을 이야기함에 있어 단수를 훨씬 더 자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해하는 방식들”에 비해 “일종의 이해방식”이 개념적으로 훨씬 현저하다는(salient) 말이지요. Understandings라고 절대 쓸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쓸 일은 매우 적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관사를 공부함에 있어 우리는 “어떤 명사에 a가 붙어?”라고 묻지 말고, “어떤 상황에 명사에 a를 붙일 수 있어?”라고 물어야 합니다. 단어의 특성으로서 관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화의 도구로서 관사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관사를 깊이 이해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대목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관사공부중

부정관사a/an과 정관사 the의 개념구분

영어사를 살피면 부정관사 a/an이 ‘하나’를 나타내는 말 one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는 “다수의 …”를 상정하고 (즉, an apple은 (multiple) apples가 있음을 전제하고), 이 다수가 이루는 집단(group)의 한 개체임을 표시한다. 따라서 a/an의 경우 셀 수 있는 명사 앞에 나온다.

이에 비해 정관사 the의 주요 역할은 특정(to specify)하는 것이다. 특정한다 함은 ‘콕 짚어서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특정의 대상이 셀 수 있는 명사일 수도 (the apple), 셀 수 없는 명사일 수도 (the money) 있다. 나아가 셀 수 있는 명사 중에서 단수건 복수건 전혀 상관이 없다. (the apple/the apples 모두가 가능하다.)

따라서 이 두 가지의 관사의 사용은 특정 명사의 성격에 귀속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해당 명사가 어떤 문맥(context)에서 쓰였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셀 수 있는 명사’와 ‘셀 수 없는 명사’의 기계적 구분인데, 이는 정관사 사용에 대해서는 별다른 정보를 주지 못한다.

#관사공부중
#갑자기다시공부중

근황

<삶을 위한 영어공부(가제)> 의 목차를 짜보고 있다. <인지언어학 이야기>는 내년 말까지 연재를 마치면 단행본 기획이 가능하다. <영어로 논문쓰기> 동영상 강의는 곧 최종 오픈한다. 다음 학기에는 가능하다면 특정 전공 교수님들과 협업을 도모하여 개별학문에 적용해 보고자 한다. 작업이 잘 진행된다면 이 또한 괜찮은 책이 될 수 있겠다. 연구자로서는 낙제점이지만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조금씩 결과를 낼 수 있음에 기쁘고 감사하다. 다음 프로젝트는 오랜 시간 방기한 나의 주전공 <사회문화이론과 영어교육>이 될 것이다. 예정은 언제나 예정일 뿐이지만 말이다.

덧. 영어 리터러시 연구자와 영어논문쓰기 강의를 함께 기획하고 진행하는 일에 관심이 있는 분이 계시다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디스크 환자의 좋은(?) 점

Posted by on Jul 17,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1. 누워 뒹굴거리는 일은 이제 더이상 게으름이 아니다. 엄연히 치료와 회복의 일환이다.

2. 앉아서 책을 읽어도 졸리지 않다. 지속적으로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3. 세상 모든 느린 걸음이 이해된다. 아울러 삶의 속도가 급속히 떨어지면서 순간순간을 만끽(?)하게 된다.

4. 지하철 역 곳곳에 설치된 손잡이의 고마움을 알게 된다. 아울러 손잡이가 없는 계단의 접근성 문제를 뼈저리게 깨닫는다. (주의: 뼈저림 = 메타포 아님)

5. 자세를 어쩔 수 없이 교정하면서 키가 손톱만큼 커진다.

6. ‘침대에서 나가지도 못했어’나 ‘앉지도 서지도 못하겠다’ 혹은 ‘길바닥에 그냥 누울 뻔했어’가 과장이나 엄살이 아님을 알게 된다.

7. 아프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금씩 걷게 된다.

8. 고통에 깨지 않고 내리 잔 날에 깊은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9. 다리와 허리가 유기적으로 이어진 단일한(?) 신체기관임을 알게 된다.

10. ‘짜릿함’과 ‘찌릿함’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원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11. 재채기가 나오려고 하는 순간의 서늘한 공포는 왠만한 공포영화를 훌쩍 능가한다.

12. 지팡이를 짚으며 느릿느릿 걸으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완전 이해된다.

13. 때로 신음은 제어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님을 알게 된다.

14. 진통제는 위대하다. 통증은 진통제보다 조금 더 위대하다. 엘리베이터 또한 위대하다. 통증은 엘리베이터보다 조금 더 위대하다.

15. 좌변기, 이거이거 이렇게 밖에 설계할 수 없나?

디스크 환자의 안좋은 점: 위의 것 빼고 다.

6주 전부터 통증 시작. 3-4주 차에는 증세가 극에 달했다. 이틀 정도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와중에 기말 채점과 성적처리를 몰아서 해야만 했는데 덕분에 증세가 호전되질 못했다. 결국 반년을 준비한, 먼 곳에서 돌아와 처음 계획한 해외 학회 참석을 포기했다. 엄청난 돈을 까먹었고 수년 만의 반가운 만남들을 포기해야 했다. 준비한 원고는 언제 빛을 보게 될지 기약할 수 없다.

하지만 2년 여를 준비해 온 여행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짝에게 양해를 구하고 함께 다녀오기로 했다. 통증은 최대한 무리를 하지 않으면서 진통제를 털어넣는 방식으로 다스리기로 했다.

이런 사람을 데리고 머나먼 곳까지 여행을 다녀온 짝과 친구들에게 너무나도 고마운 마음이다. 짐을 들지 못해 미안해하던 나에게 오히려 맘 편히 몸 잘 간수하라고, 여행 내내 더 아프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 말해주던 사람들. 이 빚을 언제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다음에 만나 맛난 밥이라도 사야겠다.

최악의 상태는 아니지만 여전히 쉽지 않은 날들을 보내고 있다. 매번 방학 때 열던 영어논문쓰기 특강 개최도 불투명해졌다. 돈이 문제가 아닌 건 아니지만 허리는 더 큰 문제. 당분간 최선을 다해 뒹굴거리리라.

아프지 않은 사람은 아픔에 대비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프기 시작한 순간 아프지 않은 시간은 인생에서 사라진다.

여러분들도 모두 허리 조심하시기를! :)

* 사진은 잊을 수 없을 스타방게르의 하늘. 조만간 노을을 정리해 봐야겠다.

네이티브 이데올로기, 그리고 네이티브의 윤리

 

1. 은밀한 것과의 싸움은 늘 어렵습니다. 못된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악당이야 잡으면 그만이지만, 오랜 시간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잡은 ‘상식적 믿음’에 저항하기는 힘들죠. 영어교육 및 외국어교육 전반에서 가장 강력한 신념은 아마도 ‘네이티브가 언어의 기준’이며, 언어사용의 적법성을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것은 원어민 집단이라는 생각일 것입니다.

이를 좀더 철학적으로 풀자면 한국어의 소유권은 한국인에게 있고, 불어의 주인은 프랑스인들이라는 생각입니다. 나머지는 그 주인들이 지정한 룰을 충실하게 따라야만 해당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어는 누가 소유하고 있을까요? 사실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소유권 주장이 가진 논리는 스스로 무너지는 듯합니다.

한국어에서 서울말 중심주의, 외국어 특히 영어교육에서의 네이티브 중심주의는 은밀한 차별의 근원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같은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여 ‘네이티브처럼 말 못하는 자신’을 열등한 존재로 느끼는 일입니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소설 제목이 떠오르는 상황이죠.

‘Ugly pronunciation’이라는 표현이 쓰이는 걸 보면 제 말이 단순한 억측은 아닐 듯합니다.이와 관련하여 언젠가 직접 겪은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외양은 한국인이지만 미국영어 원어민 발음을 가진 젊은이가 옆 자리의 친구와 나누는 대화였습니다.

A: “Are you talking about those Chinese people?.” (그 중국 사람들 이야기하는 거야?)

B: “Yeah, their pronunciation is, just, so, ugly.” (어. 발음이 그냥 너무 구려.)

모르는 사람들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마음 속으로 쏘아붙였죠.

“왜 그리 못났냐. 니들 마음이 진짜 어글리하다.”

거의 모든 영어학습자가 네이티브처럼 될 수 없는 사회문화적, 경제적, 생물학적 조건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네이티브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을 경시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요. 아니 한국어 원어민 화자로 살아가면서 타언어의 원어민이 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요? 영어실력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 몸에 새겨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네이티브에 대한 선망과 선동은 비교육적일 뿐 아니라 반과학적입니다.

누군가 소위 ‘네이티브의 발음과 언어능력”을 갖게 되었다면 그건 그들의 운이고 사회경제적 자본의 힘입니다. 그 능력 가지고 좋은 일 하시면서 즐겁게 사시면 됩니다. 한국 사회는 이미 그런 능력에 대해 충분한 물질적, 문화적 보상을 해주지 않던가요.

2. 네이티브 이데올로기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현상이 있습니다. 바로 소통의 부담을 오로지 학습자에게 전가하는 태도와 관행입니다. 네이티브가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학습자의 책임이라는 믿음이 그 바탕에 깔려 있죠.

물론 상대가 말 한마디 못하는 사람이라면 원활한 소통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최소한의 의사소통능력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데 누구나 동의하구요.

그런데 영어의 경우에는 비원어민에 대한 기대가 유난히 높습니다. 영어를 잘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죠. 소통에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영어를 제대로 못하는 사람’에게 돌아갑니다.

이런 생각은 커뮤니케이션 개론 첫 장에 나오는 소통의 근본 성격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바로 이 말입니다.

“소통은 언제나 쌍방향(two-way)이다.”

같은 모어를 쓰는 사람들간의 소통이건, 원어민과 비원어민간의 소통이건, 소통은 언제나 주고 받음입니다. 일방향 소통은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소통이란 여러 사람들 간에 생각을 교환하는 행위니까요.

그렇다면 소통의 성공은 공동의 책임입니다. 한 사람에게 전가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어떤 상황이건 소통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양육자는 아이와 소통하기 위해 말을 천천히 또박또박 합니다. 외국어 교사는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특정한 부분을 길게 발음하기도 하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네이티브의 윤리”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학습자/비원어민으로서의 책임’이 아니라 ‘네이티브로서의 책임’을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우리는 한국어가 서툰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 종종 ‘심판자’의 역할을 맡습니다. ‘이거 틀렸군’ ‘저건 웃기네’ ‘저런 표현을 도대체 누가 쓰나?’ ‘어휴 2년 넘게 살았다면서 뭐 이따위야?’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외부 자극에 대해 순간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말벌이 날아오면 피하고, 우스꽝스런 발음을 들으면 ‘풋’하고 웃게 되지요. 저 또한 최근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낭독한 오디오북을 들은 적이 있는데 매력적으로 느껴지더군요.

하지만 거기에서 끝난다면 우린 기계적 자극-반응의 노예가 되는 것 아닐까 합니다. 그런 한계를 인정하지만 언제나 그 한계에 저항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1) 우습고 어이없는 발음과 문법을 만날 때 심판자의 역할을 맡고 싶은 유혹을 제어하는 것, (2) 상대의 ‘부족한’ 실력을 원어민의 지식과 경험으로 보완하는 것, (3) ‘원어민 대 비원어민’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 대 인간’으로 평등하게 소통하려 노력하는 일.

비원어민은 죄인이 아닙니다. 네이티브는 벼슬이 아니고요. 그저 우리가 처한 삶의 다양한 양태일 뿐이죠. 괜히 쪼그라들 필요가 없습니다. 도울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도우면 되고요. 계속 배우면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원어민 혹은 비원어민이 아니라, 더 깊은 소통을 통해 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말을 배워가며 사는 거 아닙니까.

#삶을위한영어공부

시간강사 문제의 해법

Posted by on Jul 3,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졸린김에 ‘헛생각’을 좀 해봅니다.

시간강사의 문제를 (1) 대학과 연구기관의 고용이나 (2) ‘객관적’ 연구자 평가지표의 문제로 풀려 하기 보다는,

(1) 국가 및 지역 평생교육의 체제의 획기적 변화와 (2) 지식생태계의 다양성 확보의 문제로 풀어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학에 무언가를 기대하기엔 이미 늦어버린 것 같달까요. 단순히 인구절벽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은 아니고요.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동일성에 대한 민감성의 차이

Posted by on Jun 27, 2018 in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지하철에서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만 봐도 다른 칸으로 탈출하고 싶어지지만 시스템이 부과하는 폭력적이리만큼 엄청난 동일성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개인적 차원과 시스템적 차원에 있어 동일성에 대한 민감성은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창피한 우연

Posted by on Jun 27,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동네 서브웨이에 갔다. 점심시간, 줄이 길었다. 어제 시작한 앨리슨 고프닉의 책에서 모방학습에 대한 챕터를 읽고 있었다. 모방이 인간의 성장과 문화, 나아가 양육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우리가 은연중에 얼마나 많은 모방을 하며 살아가는 지, 부모 자식간에 모방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일어나는지 등등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목이었다.

한 10분 기다렸을까. 앞의 한 여자분이 “허니오트로 주세요”라며 주문을 시작했다. 음, 나와 같은 빵이군. “다음손님은요?” “허니오트요.” “아메리칸 치즈 괜찮으세요?” “네.” “다음 손님도 치즈 괜찮으세요?” “네.” 아, 이거 뭔가 따라하는 것 같아. 따라하는 거 절대 아닌데! 다음은 이후 전개된 상황.

“토스트 해드릴까요?”
“네.”
“다음 손님은요?”
“네. 해주세요.”

“야채 빼는 것 있으세요?”
“없고요. 올리브 많이 넣어주세요.”

헉. 올리브! 그건 내 대사인데!!

“아채 빼는 거 있으세요?”
“아니오.”

‘올리브 많이 넣어주세요’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는데 간신히 참았다. 빵에, 치즈에, 토스트에, 야채에… 올리브까지 똑같이 말하면 급 ‘스토커’가 되어버리는 것 아닌가. 순간 철저히 독립된 사건을 인과관계로 묶어버리는 나의 허약한 마음에 실망했다.

“드레싱은요?”
“랜치랑 후추 넣어주세요.”
“다음 손님은요?”
“(괜히 신나서) 그냥 없이 주세요!”

앞 사람은 아무 생각 없었을텐데 ‘올리브 많이 넣어주세요’를 참은 게 왠지 창피했다. 그래서 앞사람이 나가고 핸드폰을 확인하는 척 하며 30초 정도를 기다렸다가 가게문을 나섰다. 스토커 싫어!

사건 요약: 앨리슨 고프닉의 지적대로 인간의 생존에 있어 모방은 중요하다. 하지만 때로 덜 모방함으로써 이상한 사람이 안될 수 있다. 서브웨이는 두 사람씩 묶어서 물어보는 거 안하면 좋을텐데…

오늘의 창피한 우연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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