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칭, 문화, 그리고 권력

Posted by on Jun 29, 2014 in Uncategorized | No Comments

어제 지도교수와의 세미나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같이 생각해 볼만한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권력은 매우 미세하게 작동합니다. 물리적, 제도적 힘 뿐 아니라, 사회적 관습과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 작동되기 때문이죠. 따라서 권력 관계는 삶에서 은밀하게 표출됩니다. 아래 지도교수의 경험은 이러한 권력의 미묘한 속성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오래 전 지도교수는 한 학교에 잠시 머무르면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교수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같이 가르치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로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지도교수는 늘 그렇듯 학생들에게 자기를 이름 (first name) 으로 불러달라고 했답니다.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했지요. 권위적인 문화를 워낙 싫어하는 사람이라 학생들이 친근하게 자기 이름을 부르도록 하는 건 너무나도 자연스런 일이었던 거죠. 그런데 같이 가르치던 교수님이 이에 대해서 “자기의 권위를 손상시켰다”는 식의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제 생각에 그 말을 듣는 순간은 참 황당한 일이라 느꼈을 것 같습니다. 우스개 소리로 “호칭을 뭘로 하건 잘 가르치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을 수 있었겠죠.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일단 저의 지도교수는 방문자의 입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곳에서 “Dr. ~” 나 “Professor ~” 라는 식의 호칭이 통용되고 있었음을 고려해야 했습니다. 이 점을 놓친 것이죠. 더욱 중요한 것은 “(성 말고) 이름으로 불러요”라고 말하는 자기 자신은 미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백인 대학 교수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같이 가르치는 교수는 그와 “반대의” 인종과 성별을 갖고 있었죠. 

아프리카계 여성 교수의 입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세계 초강대국의 최상층에 위치하고 있는” 백인 남성 교수가 타지에 와서는 말 한마디로 자기 커뮤니티의 규칙을 무너뜨린 셈이 된 것이지요. 이 작은 행위가 미치는 영향은 미묘하지만 강력한 것이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모두가 “Dr.~”와 “Professor”를 사용하는 상황에서 유독 자기만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이죠. 학생들의 반응에 대해서 들은 바는 없지만 “매너 좋고 친근한 인텔리 백인”이라는 문화적 스테레오타입이 작동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습니다. 

사회문화적 맥락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같습니다. 위의 예에서 보듯 성별과 인종이라는 요인이 특정한 상황에서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겠지요. 호칭에 있어서의 개인적 선택(서로 이름을 부르면서 친하게 지내보자)이 거대 사회구조적 갈등관계(인종, 성별)와 특정 맥락의 관습(교수에 대한 호칭)과 별개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개인의 선의는 언제나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정의되고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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