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문화의 관계: 차승원의 레이븐 광고 사례를 중심으로

Posted by on May 5, 2015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지하철 승강장에서 차승원의 레이븐 광고를 보았다. 차승원의 이미지 옆에는”괴물들 요리하러 가볼까” 비스무레한 문구가 큼지막하게 박혀있었다. 이 상황에서 많은 한국인들은 광고를 쉽게 이해한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저게 뭐지’라며 질문을 던질 사람이나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도 꽤 많을 것이다. 연령과 문화적 관심이 중요한 변인이 될 것이고.)

학생들에게 ‘어떻게 이런 직관적 이해가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보통 ‘한국어를 잘하니까’라는 상식적인 대답이 돌아온다. 맞지만 결코 만족스럽지 않은 대답이다. 이 글에서 그 이유를 간단히 설명해 보려 한다. (학술적인 논의가 아니므로 허점이 많이 있지만 언어와 문화의 관계를 조명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자 이제 광고를 이해하는 다양한 수준을 상상해 보자. 단 한국어 구사능력은 중상 이상이라고 가정한다.

기초적인 수준에서라면 다음과 같은 생각이 가능하다.

1. 레이븐이 뭐냐? 괴물들 어쩌고 하는 거 보니 영화인가? 게임인가?

이 단계에서 <레이븐>이 영화인지 게임인지 혹은 다른 상품 혹은 서비스인지 이해하는 것은 (‘레이븐’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다고 할 때)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니다.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경우 이 두가지를 구별하기 위해서 동원할 수 있는 것은 기존의 영화광고와 게임광고에 대한 다양한 지식이다. 즉, 영화 광고와 게임 광고, 기타 상품/서비스 광고에 대한 기존 경험을 동원하여 광고의 내용을 추론해 보는 것이다.

2. 저 사람(차승원)은 누구일까? 광고 모델 하는 걸 보니 유명한 거 같은데?

한국의 광고문화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지하철 광고에 전신으로 등장하는 사람이 유명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규칙이 모든 광고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과 미국 광고에서 유명인 비율이 다르다는 기사를 본 기억도 난다. (미국 광고에서는 의사 등의 전문가들이 한국에 비해 더 자주 등장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3. 괴물을 요리해? 음… 요리해서 먹는 건가? 정확히 무슨 뜻이지?

‘요리’가 다의어로서 가지는 다양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요리하다’의 기본 의미만을 안다면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에 비해 ‘요리’의 다른 뜻을 알고 있다면 아래와 같이 이해할 수 있다.

4. 아 ‘요리하다’는 음식을 하는 거 말고도, ‘일이나 사람 따위를 제 뜻대로 다루어 적당히 처리하는 것(다음 사전)’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하던데, 그 뜻으로 쓰였나 보군.

이제는 차승원이라는 배우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의 신체적 특징을 알고 있다면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5. 차승원이 몸이 좀 좋지. 광고 잘 어울리는구만.

거기에 그의 목소리까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다음과 같은 이해도 가능하다.

6. ‘요리하러 가볼까?’ — 이거 완전 차승원 목소리로 재생되네? ㅋㅋㅋㅋㅋ

이에 더해 차승원이 등장한 몇몇 작품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7. <혈의 누>에서도 싸움 잘 하는 역할로 나왔는데… 그 이미지랑 잘 어울리는구나.

마지막으로 최근 출연한 <삼시세끼>의 ‘차줌마’ 역할을 기억한다면 아래와 같은 생각도 가능하다.

8. 오 <레이븐>과는 관계 없지만 ‘요리’라는 단어가 ‘차줌마’ 이미지랑 묘하게 겹치네. 카피라이터가 ‘요리’라는 표현을 일부러 고른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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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분석에서 지하철 광고판 하나를 이해하는 데에도 매우 다양한 언어적, 문화적 요소들이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어를 잘한다’와 ‘한국문화를 잘 이해한다’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명제인 것이다. 아울러 ‘한국문화’도 ‘한국어’도 거대한 하나의 체계가 아니며, 그 안에 수많은 변이와 ‘서브컬처’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한편 광고 한 컷을 이해하는 데에도 이렇게 다양한 요소들이 개입된다면 다른 언어로 된 문학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번역하는 데 필요한 언어적, 문화적 지식의 양은 실로 엄청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영어교육을 업으로 하는 입장에서 ‘언어코드’에 관한 과도한 집착은 늘 아쉽다. “기본 언어도 안되는데 무슨 문화예요?”라고 질문하기 보다는 문화적 경험과 언어적 경험이 손잡고 갈 수 있는 길을 터주어야 한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광고나 정치 슬로건 분석 등과 같은 담화분석(discourse analysis)이 한 가지 아이디어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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