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평가, 대학, 자본, 그리고 우리

Posted by on Jun 12, 2015 in 단상, 수업자료, 일상 | No Comments

아래 기사를 읽으니 하고 싶은 말이 생겼습니다. 아니 기사 덕분에 오래 전부터 눌러왔던 생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고 해야겠네요. 분명히 제 의견에 허점이 있겠지만 한번 들어주시면 좋겠어요.

제 생각에 대학은 백화점이 아니고, 저는 매장 직원이 아니고, 여러분들은 물건을 사러 온 고객이 아닙니다. “내 돈 내고 내가 수업을 듣는다”는 말은 현실에 대한 정확한 묘사같지만, 교실에서 일어나는 활동이 여러분들과 저의 현금거래를 의미하진 않습니다. 제가 노동자라고 해서 여러분들이 자동으로 제 사용자가 되는 것은 아니죠.

시대가 변하고 취업시장도 변하니 교육도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습니다. 값비싼 등록금에 상응하는 만족을 얻어야 한다는 의견도 무시할 수는 없구요. 그런데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물건 사고팔기로, 교육에 대한 평가를 ‘고객 만족도 조사’, 나아가 직원에 대한 불만접수 창구로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여요.

이런 움직임은 미국에서 시작되어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로 확산된 학생평가(student evaluation)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언젠가 한 지인이 학생평가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공감이 되었어요.

“학생들이 ‘담당교수는 해당학문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라는 항목을 평가하는데, 그 친구들이 정말 교수의 전공지식수준을 평가할 수 있는가? 이런 저런 항목을 잘 정리해주면 전공지식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제대로 된 평가는 힘들다고 본다. 혹 학생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쳐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왜 ‘이 과목을 통해서 해당분야의 공부를 더 깊이 해보고 싶은 생각이 생겼다’거나 ‘이 수업을 통해 내가 해당 학문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같은 항목은 없는가? 교실에서 결국 하고자 하는 일은 나와 학문, 그리고 세계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 아닌가?”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일화가 있습니다. 꽤 오래 전인데 선생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단체행동’을 통해 교수평가 최하점을 준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물론 그 강사는 다시는 강의를 맡지 못했죠. 마음의 상처와 배신감도 꽤나 깊었을 것 같구요.

건너 들은 이야기이니 학생들의 집단행동이 적절했는지 판단할 근거는 없어요. 하지만 확실한 건 학생과 교수가 직접 소통하지 못하고 ‘더 큰 권위’에 의지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는 거예요. 투서, 진정, 고발, 익명평가 등등. 얼굴과 얼굴이 만나는 불편함, 감정의 소모는 최소화하고 ‘보이지 않는 손’을 활용하고자 하는 경향 말이예요.

‘제도가 있으니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쓰라고 만들어 놓은 제도 아니냐’라는 태도죠. 그런데 공식화된 제도 활용이 최선의 소통방식인지 한 번 더 생각해 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요? 그 제도가 한 사람에게 엄청난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말이죠.

교수와의 대면을 피하려는 경향이 절대 학생들의 잘못은 아닙니다. 수사적으로 덧붙이는 말이 아니예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학생과 선생은 아무리 봐도 비대칭적인 관계거든요. 선생은 평가권이 있고 낮은 학점은 취업에 직격탄을 날리죠.

때론 형편없는 선생도 있습니다. 수십 년째 똑같은 강의를 반복한 하는 선생, 차별과 비하를 일삼는 선생, 강의를 밥먹듯이 빼먹는 선생, 권위주의와 선입견에 쩔어있는 선생들에겐 분명 문제가 있죠.

일부 학생들과 선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요. 좀더 생각해 볼 것은 이런 ‘일부 개인들’이 학교를 백화점으로 만드는 주범인가 하는 점입니다. 정말 ‘물을 흐리는’ 몇몇 개인의 문제일까요?

다양한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제 생각은 이래요.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문제적 개인은 언제나 존재해요. 그런데 좀더 근본적인 건 그런 개인들이 터하고 있는 정치경제적, 사회경제적 지반 같아요. 개인들은 진공에 있지 않거든요. 특정한 물리적, 제도적, 심리적 생태계 속에서 살아가죠. 구체적으로 지금의 대학교육을 지배하는 힘, 즉 우리의 학문생태계를 정의하는 힘은 대학이 사회와 맺는 관계, 좀더 구체적으로는 대학과 자본 사이의 관계 아닐까 합니다.

소위 ‘대학의 자본종속’은 기업들과 대학의 관계에 대한 묘사로 이해되죠. 대학이 기업의 눈치를 보고, 기업이 원하는 인재형을 교육의 목표로 삼고, 기업의 돈을 끌어오기 위해 비판성을 상실하는 것. 대학당국과 기업과의 관계라… 어쩌면 여러분들과 관계 없는 큰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제 느낌에 대학이 자본에 종속된다는 건 우리들의 행위가 결국 누군가의 감시를 받는 일과 비슷해요. 신문이 자신의 밥줄이 되는 광고주들을 비판할 수 없듯이, 대학은 자신의 물주가 되는 자본에 쓴소리를 할 수가 없어요. 대학이 할 수 없는 쓴소리를 일개 강사가 해서는 절.대. 안되겠죠? ㅎㅎ

자본의 입장에서는 ‘반기업적 정서’가 악의 축이고, 이걸 비판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건 매우 근시안적 사고라고 봐요. 잘못된 기업을 호되게 비판하지 않으면 경제가, 사회가 무너져요. 최근 교육부가 주장하는대로 기업이 필요로하는 인재를 키워내는 게 대학의 목적이라면 대학이 따로 있을 필요가 없어요. 직업교육 양성소를 확대하고 기업들이 인재연수를 좀더 체계적으로 시키면 되죠.

여기에서 제가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대학이 기업에 종속되어 할 말을 하지 못한다’는 말은 대학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는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대학의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대학 구성원들에게 특정한 의견을 강요한다’는 뜻으로 이해하셔야 한다는 거예요. 대학의 종속은 대학이 생산하는 담론을 자본친화적으로 만들려는 구체적인 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대학당국이 구성원들에게 해야 할 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정해주고 감시하고 처벌한다”는 뜻이 되는 거죠.

아울러 대학이 자본에 종속된다는 것은 사회가 갇힌 시스템이 된다는 의미예요. 사회가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하는 거죠.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성될 조건을 스스로 파괴하는 거예요. 결국 그렇게 탄생한 자본친화적 대학은 이미 많은 걸 갖고 있는 사람들의 이익에 복무하죠.

기업이 대학에 영향을 미치면 사회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죠. 그런데 제가 공부한 바로는 혁신은 기업만 하는 것이 아니예요.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사상과 문화의 흐름이 인류를 혁신시켜 왔죠. 사실 기업의 혁신은 근대 자본주의 형성 이후에나 발견되는 최근의 현상이죠. 역사가 매우 짧아요. 그런데 대학이 자본에 종속된다면 사회적 혁신은 기업을 위한 혁신과 동의어가 되는 것이고, 이것은 인류에게 엄청난 손실이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어이쿠, 시간이 많이 지났네요. 그저 교실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 아이디어가 충돌하는 곳이지 ‘고농축 지식 캡슐’을 단체로 받아먹는 곳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래고 고백하건데 제겐 그런 캡슐 제조 능력이 없답니다. ^^

그래서 결론은, 선생과 학생의 관계를 둘러싼 더 넓은 세계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제 생각이 여러분들과 다를 수 있겠지만, 이 또한 ‘하나의 의견’으로 들어주시면 좋겠구요. 물론 저도 여러분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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