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네이티브 스피커의 시선

Posted by on Jul 1, 2015 in 링크,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영어 | No Comments

“안녕하세요? 미국에서 온 데이브입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비디오는 데이브와 토익에서 고득점을 한 두 한국인의 수능 외국어 영역 시험 풀이를 스케치한다. (데이브의 첫 인사는 “미국에서 온”을 강조하는 듯하다.)재미있는 것은 굳이 유명어학원의 강사를 감독으로 불렀다는 것. 친구라 그랬을까? ^^

시험을 보기 전 Dave는 두 한국인에게 “How long have you been studying English in Korea?”라고 묻는다. (여기에서는 “in Korea”에 주목하자. “한국에서(in Korea)”라는 말이 “미국에서 온(from the US)”이라는 말과 명확한 대구를 이룬다.) 한국인 두 명은 20년이라고 대답한다. (친절한 자막은 한국인의 발화에서 틀린 부분을 고쳐 괄호 안에 제시한다!)

시험을 보는 동안 데이브는 연신 머리를 긁적인다. 한국 사람 둘은 이미 다 푼 문제를 끝까지 붙잡고 있는 장면이 이어진다. 채점 결과는 100, 96, 76. 예상대로 데이브가 꼴찌다.

바로 다음 나오는 대사가 “I failed as an American.”이다. 응당 영어를 잘해야 할 미국인이 실패했다는 것. 이 문장은 처음에 강조했던 ‘from the US’를 다시 한 번 상키시킨다. 흥미로운 건 “as an American”이라는 표현이 단수형이지만 ‘미국 대표 선수로서’의 느낌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전체 비디오의 내용을 고려할 때 그런 느낌을 받는다는 뜻으로 ‘as an American’의 문자적 해석은 아니라는 점을 밝혀둔다.)

좌절한 표정의 데이브. 하지만 곧이어 그의 반격이 시작된다. “스피킹 시험이었으면 어땠을 거 같아요?”라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 “네?(Pardon?)”라는 답을 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수능 읽기 시험 점수보다는 말하기 실력이 더 중요한 것 같다는 발언이 나온다. 뭐 여기까지는 그런가 보다 할 수 있다.

말미에 한국인 학습자 한 명이 수능 문제를 가리키며 “그럼 이거 미국 가면 한 마디도 안 쓰는 말들이야?”라고 묻는다. 데이브는 ‘What the’라는 감탄사와 함께 “paradigm shift”과 “overturned”라는 표현이 들어간 문장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한탄한다. 물론 표정이 좋지 않다.

이 장면에 이르자 이 비디오가 좀 불편해졌다. 수능 영어문제의 난이도를 떠나 “paradigm shift”과 같은 종류의 단어를 ‘평생 써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한국 영어교육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는 서사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어 떠오른 생각의 파편을 주섬 주섬 모아본다.

1. 영상은 ‘네이티브가 망가지는 프레임’을 통해서 한국 교육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위에서 밝혔듯 비디오 곳곳에 ‘네이티브 대 한국인 영어학습자’의 구도가 드러난다.

2. 그럼에도 네이티브 스피커 한 사람의 의견이 묘한 힘을 갖는다. ‘paradigm shift’같은 단어를 왜 배우느냐는 식의 표정과 말투는 망신당한 출연자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상화된 ‘미국인 네이티브 스피커’의 시선이다.

3. 다시 말해, 데이브가 ‘paradigm shift’가 들어간 문어체 문장을 읽으며 보여주는 표정은 자신의 부족함이 아니라 한국 영어교육의 ‘비정상성’을 겨냥한다. 네이티브도 잘 모르는 표현을 왜 공부하고 앉았냐는 투인 것이다.

4. 미국에서 고등학교 교육을 마친 사람에게 ‘paradigm shift’의 뜻을 물었을 때 몇 프로나 답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단어가 엄청나게 희귀하다거나 살면서 절대 쓸 일이 없는 단어는 아니라는 점은 확실하다. 참고로 구글에서 ‘정확한 표현 검색’으로 했을 때 약 770만 건이 검색된다.

5. 결국 수능독해, 그것도 미국인이 절대 쓰지 않을 표현이 잔뜩 들어가 있는 글을 공부할 시간에 차라리 네이티브가 자연스럽게 쓸 수 있는 일상회화를 공부하자는 것이 영상의 주요 메시지다.

6. 일상생활에서 물건을 사고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게 영어교육의 목표인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존재한다. ‘paradigm shift … overturned’와 같은 문장을 읽어내는 일이 인생에 도움이 될만한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 차이를 무시하고 ‘너희들은 왜 이런 걸…’이라고 말하는 듯한 태도는 솔직히 이해하기 힘들다.

7. 역으로 미국인이 외국어로 한국어를 공부한다고 해보자. 그가 ‘분단체제의 고착화’ 같은 표현이 들어간 한국사 관련 지문을 읽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분단 체제 고착화’라는 표현은 절대 쓸 일 없는데…”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난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8.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할지라도 한국 영어교육을 비판할 때 등장하는 네이티브 스피커의 시선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때로는 “무엇을”보다 “누가 말하는가”가 메시지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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