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타니 코오진 (탐구 1): 비트겐슈타인, 키에르케고르, 예수, 그리고 타자

Posted by on Aug 29, 2015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예수는 신이나 초월자나 물자체라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는 확실히 눈에 보이고 실재하는, 오히려 볼품없이 왜소한 타자이며 그리고 우리로서는 그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한 그러한 타자이다. (p. 156)

다만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교 교인이라는 ‘그리스도교 세계’에 그리스도가 부재하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교 교인인데도 누구 하나 그리스도교 교인인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의 과제는 ‘그리스도교를 그리스도교 세계에 도입하는’ 일이다. 그 경우 그리스도교란 *그리스도*, 바꿔 말해 *타자*이며 ‘그리스도교 세계’란 타자를 결여한 사고 일반을 의미한다. (p.158)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교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도입하는 것이다. 사실상 키에르케고르가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타자성이다. 우리 자신의 공감이나 가정이 미치지 않는, 다시 말해 우리의 언어 게임에 속하지 않는 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 문제인 것이다. (p. 158)

그리스도가 신인 동시에 인간이라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그가 인간도 아니며 신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키에르케고르가 우리에게 지적하려고 한 것은 바로 그러한 타자이다. (p. 159)

비트겐슈타인에게서 타자란 ‘우리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즉 언어 게임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은 ‘직접적인 전달'(키에르케고르)이 아니라 ‘직접적인 전달’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 자체의 전달(규칙을 가르치는 것)이라는 차원에서 생각되어야 한다. ‘직접적 전달’은 언어 게임을 공유하는 사람 사이에서 가능하다. 또한 그 경우에도 그러한 전달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규칙,코드(초월자)를 끄집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언어 게임이 공유된 다음의 *사후적인* 설명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커뮤니케이션을 기초지울 수는 없다. 물론 타자(언어 게임을 달리하는 사람)와의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커뮤니케이션이 합리적으로는 불가능하고 기초지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그것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랄만하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이 역설적인 사실성을 말살하고 난 뒤에야 이루어지는 합리적인 기초지움이나 회의론이 바로 바로 케에르케고르적으로 말해 ‘그리스도의 말살’인 것이다. (p. 160)

‘말하다-듣다’라는 관계가 성립하려면 그 규칙이 가르쳐지지 않으면 안된다. 가르친다는 것은 규칙을 가르치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규칙을 알면서도 규칙 자체는 ‘알지’ 못한다. 예수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자신이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동시에 ‘알 수 없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복음서에서 인상적인 것은 ‘가르치는’ 사람의 우위성이 아니라 무기력함이다. (p. 161)

다시 말해 키에르케고르는 타자와의 관계=커뮤니케이션의 기저에 합리적인 토대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론을 생각할 때는 그러한 ‘심연과 비약’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는 ‘철학적 언어’로부터 ‘일상 언어’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회귀하는 곳은 다름 아니라 철학적(합리적)으로 불가능함에도 일상적으로는(실제적으로는) 가능하다고 하는 놀랄만한 *사실성*이다. 바로 거기에 ‘언어 게임’이 존재한다. 언어 게임은 논리적인 파라독스가 아니라 살아 있는 파라독스이다. (p. 163)

– 가라타니 코오진. (1998). 탐구1. 새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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