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고 싶었던 하루

금요일 오후. ‘이번 주도 그럭 저럭 버텨냈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한 주의 피곤이 몰려오는 시간. 두 초등학생 친구와 만나기 시작한 지 어언 1년 반이 되었다. 두 친구는 이제 중학교 체육복을 입고 수업에 온다.

솔직히 처음에는 힘들었다. 낯가림이 심해 말도 붙이기 힘든 상황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란 불가능했다. 게다가 그들의 삶엔 이미 충분한 양의 영어가 있었다. 학교 수업에, 과제에, 학원에… 주말을 코앞에 두고 별로 재미나지도 않은 선생에게서 영어를 또 배워야 할 이유는 도무지 없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영어를 가르쳐야 한다는 의무감을 완전히 놓아버렸다. 대신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다. 말벗이 되어보기로 한 것이다.

대부분 시시콜콜한 학교 이야기였다. 준비된 인터뷰도, 거창한 토론도 없었다. 가끔 영어가 끼어들 틈이 있을 때 조금씩 던져주는 게 다였다. 교재도, 단어 목록도, 진도도, 숙제도 없는 영어수업도 아니고 수다떨기 모임도 아닌 이상한 수업이 이어졌다.

그렇게 1년 쯤 지나자 친구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일상의 진솔한 이야기들도 별 거리낌없이 나눠주었다. 학교 생활, 과제, 친구, 취미, 가끔 속상한 일들에 대해서도 솔직한 대화가 가능해진 것이었다. 여전히 나를 ‘친구’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만, 서로에 대한 믿음이 조금씩 쌓여가는게 느껴졌다.

최근에는 유튜브 영상을 모티프로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어제 본 것은 “Teens react to Walkman”이었다. 요즘 어린 친구들이 소니 워크맨 초기 모델을 보고 ‘이게 뭐지? 참 신기하군! 테잎은 도대체 어떻게 넣는 거야?’ 등의 반응을 보이는 내용이었다.

영상을 검색하여 띄우던 나는 깜짝 놀랐다.

두 친구 모두 스스로 펜과 노트를 꺼내는 것이었다. 게다가 필기를 하라는 ‘명령’도 없었건만 내가 언급하는 표현을 열심히 받아적기 시작했다. 한 시간에 고작 7-8개이지만 잘 배워보려는 모습이었다. 믿기지 않는 순간이었다. 친구들은 눈치챘을까? 신이 나서 더 열심히 떠들어대던 나의 모습을.

정해진 한 시간이 지나고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두 친구가 떠난 빈 방을 돌아보았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올라왔다. 그리고 참 많은 일들이 머리 속을 스쳐갔다.

어쩌다가 한 번 그런 것이었을 뿐, 아이들은 여전히 딴 곳을 쳐다보고 낙서를 하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빨리 끝내달라는 눈빛을 보낼 것이다. 나 또한 영어를 공부해야 한다고, 시간을 낭비해선 안된다고, 할 거면 제대로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이면 아이들도 나도 ‘오늘은 수업 취소 안되나?’하는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그렇다. 바뀐 건 없다.

하지만 이런 경험 속에서 금요일 오후 시간은 ‘때우는 시간’이 아니라 ‘채우는 시간’이라는 믿음이 커가고 있음을 느낀다. 거창한 수업이 아니어도, 학교 성적에 도움이 되지 않아도 이야기할 ‘친구들’을 만나는 일이 그리 나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냥,
이 날을 기억하고 싶다.

2015.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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