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단상

1.

교수법의 문제가 자아의 문제를 포괄하지 못한다는 것, 다시 말해 교수학습이론은 교사와 학생의 내면에 대해 최소한의 관심만을 가진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이 사실을 인정할 때 교실은 교수학습방법론의 해석과 적용이 아니라 교수학습이론이 현실에 의해 재정의되고 재구성되는 비판적 실천의 장이 된다. 이러한 비판적 실천이야말로 교육이론을 밀고 나가는 궁극적 동력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회사는 경영-조직이론이 재구성되고 재창조되는 비판적 노동의 공간이 되고, 종교기관은 전통적 교리가 재구성되고 재창조되는 비판적 신앙공동체가 된다. 이것이 가능할 때 우리는 일하는 기계나 맹목적 신자가 아니라 전통과 현재의 상태 그리고 새로운 여정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역사적 인간이 된다.

어떤 공간이든 주체의 역사-삶-지향 즉 과거-현재-미래를 모두 고려하지 못할 때 교조적이며 권위적인 조직으로 추락한다. 시간이 사라진 공간은 성장하는 유기체가 아니라 회색 콘크리트일 뿐이다. 이 사회가 진짜 창조를 원한다면 비판과 소통, 실험과 실패를 권장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

이론으로서의 교수법이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방식은 권위적이다. 유명 학자들이 쓴 교수법 책에는 (저자들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이게 가장 좋은 길이니 현장에 적용해야 해”라고 말하는 듯한 아우라가 있다. 그러나 주체의 삶과 유기적으로 통합되지 않는 과학적 지식은 힘을 잃게 되고 때로는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수업은 그리 많지 않다. 사실 수많은 교사들의 경험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명확한데, “최선의 교수법은 이론-내부에 있지 않고 이론과 주체가 만나는 상호작용의 공간 interactive space 에 있다”는 것이다. A+B에서 A나 B가 아니라 플러스(+) 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 (써놓고 보니 언젠가 학생회 선거에 등장했던 “다만 당신과 소통하고 싶다”라는 슬로건이 생각난다.)

3.

교사는 매일 용기를 잃게 된다는 파머의 말이 마음을 파고든다. 그러나 상처를 받는 그 공간에서 상처를 넘어서는 용기를 얻게 되는 것도 사실 아니던가. 어떤 일이나 사람이라도 내가 원하는 반응만을 주진 않는다. 기실 상호작용의 대상으로부터의 상처는 상호작용의 정의에 포함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상호작용하는 “대상”이라고 썼지만, 그 대상은 나와 동일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주체와 주체의 만남은, 주체가 대상을 제어하는 ‘이용’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기에 어긋나고 부딪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부터도 엄청난 상처를 받을 수 있지만!)

“교직은 매일 마음의 상처를 주는 직업이기 때문에 우리는 용기를 잃는다. 반드시 교실에서 알몸으로 서 있는 기분을 느껴야만 용기를 잃는 것은 아니다. 칠판에 문장분석을 하거나 수학증명을 풀고 있을 때, 학생들이 졸거나 쪽지를 돌리기만 해도 교사는 낙담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과목이 아무리 아무리 기술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내가 가르치는 것은 결국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중한 것이 나의 자아의식을 형성한다.” – 파커 J. 파머. <가르칠 수 있는 용기> (한문화) 38쪽

 

2013.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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