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운대로 가르치기’에서 벗어나기

요즘 내내 붙잡고 있는 화두가 있습니다.
아마도 평생 가져갈 화두인 것 같습니다.

“배운 대로 가르친다.”

이렇게 말하든 안하든,
저를 포함해서 많은 분들이
예전에 배운대로 가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배운 대로 가르치는 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또 모든 선생님들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도 아니구요.
다만 이런 경향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지식을 전달하는 방법은
지식 자체의 성격과 맞물려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지식이라 하더라도
전달하는 방식에 따라
학생들에게 다른 *의미*가 되죠.

지식의 습득은
지식에 대한 태도와 의미가 구성되는 방식과
동전의 앞뒤면처럼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나 할까요.

이미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이 계시고,
교사 개개인의 자질이 나아지고 있다는 평가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교실에 대해 불신을 갖는 이유가 뭘까요?

이에 대해 한 가지 답을 내릴 수는 없을 겁니다.
한국의 입시문화, 학력주의, 신자유주의적 경쟁체제 등등,
교육을 쥐고 흔드는 괴물이 너무 많죠.
사회경제적, 문화적 자본의 불평등은
말할 수 없이 심화되어 가구요.

이런 비관적 상황 속에서
“그래도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나?”라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가르치는 사람들의 성찰과 소통,
비판적 실천, 그리고
더 나은 교육과 세상에 대한 의지가
희망의 단초가 되지 않을까요?

교사가
배운대로 가르치는 존재에서
배웠던 것, 방법을 의심하는 존재로,
최신 이론을 가져다 쓰는 존재에서
그것을 자신이 처한 교육의 맥락에서
재구성하고 발전시키는 존재로 성장한다면
멋진 일들이 조금씩 일어나지 않을까요?”

물론 여전히 상황은 비관적입니다.
교사가 교육 전체를 바꾸려고 하는 건
계란에 바위치기 같은 것이죠.

하지만 몇 년 안되는 교직 경력 속에서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선택한 순간
갑갑한 교육현실을 냉소하거나
학생들에 대해 절망할 자격은
영구히 박탈된다는 것.

절망적인 통계 결과 앞에서도
절망할 자격이 없다는 것.

가르치는 일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일이며
구체적 실천으로
희망을 만들어 가는 일이기 때문에…

“넌 할 수 있어” 처럼
값싼 희망의 말 몇 마디가 아니라
모두 같이 삶을 같이 일구어 갈 수 있다는 믿음.

교육을 통해 인류가 가진
가장 값진 것들을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때
모두가 더 행복해 질 수 있다는 확신.

어떤 교과를 통해서건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희망.

가르치는 일은
이런 가치들을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할 운명에
스스로를 묶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배운대로 가르친다면
왜 교사교육이 필요한가?”

저에겐 아직 답이 없습니다.
아마 평생 지고 가야 할 문제일 겁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나는 두 가지 구절이 있습니다.
파커 파머의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르칩니다.”라는 말.
그리고 헨리 지루의 책 제목이기도 한
“교사는 지성인이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교과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입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스펙을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학생 자신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학생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 자신의 일부가 될 지식을 만들어 나갑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지성인으로서 연구하고 토론하고 실험하며
우리 자신의 교육을 만들어 갑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가르칠 때
학생은 학생 자신으로 교실에 들어옵니다.
우리가 지성인으로 스스로를 정립할 때
학생들도 스스로를 지성인으로 키워갑니다.

이제
“교육은 계급을 재생산하는가?”라고 묻지 말고,
“교육은 계급을 재생산해서는 안된다”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배운대로 가르치는 존재에서
평생 배우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

거창하게 들리지만
정말 즐거운 여정 아닐까요?

__ 이상 한 이상주의자의 비오는 밤 넋두리였습니다.

2013.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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