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조어 단상

Posted by on Nov 17, 2015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헬조선’ 조어 단상

적어도 내게 ‘헬조선’은 최근 신조어들 중에서 가장 섬뜩한 단어다. 한국사회의 정치경제적 비참함을 가감없이 드러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헬’과 ‘조선’의 결합이 가져오는 의미가 무척이나 강렬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하의 논의은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이다. 왜 그딴 식으로 느끼느냐고 뭐라 하진 마시기를 부탁드린다.)

1. 우선 ‘헬(hell)’을 보자. 헬의 /h/는 숨찬 자음이다. 강하게 발음하면 숨이 턱까지 타오른다. 헉헉… 헉헉… 헬멧이 파손된 화성의 마크 와트니처럼 산소 레벨이 급격히 떨어지는 사회다.

2. ‘헬’은 영단어다. 서양의 것이다. 하지만 서양의 낱말 중 지금 여기를 정의하는 것은 ‘헬’이다. 왓더헬. KOREA.HELL.YOU.

3. 기독교적 의미의 ‘헬’은 미래다. 죽음 이후에 대면하게 되는 곳. 유황불은 훨훨 타오르지만 구더기는 죽지 않는 참혹한 형벌의 공간.

4. 지옥은 영원하다. 그렇기에 어떤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헬’은 미래의 시간이면서 영원히 지속된다.

5. 다행히도 헬은 본디 ‘죄인’의 공간이다. 회개하는 자들은 ‘천국’에 속한다. 하지만 지금 이곳 한국사회까지 ‘마수를 뻗친’ 헬은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헬 안에 갇혀 있다.

6. 이제 ‘조선’을 보자. 기본적으로 조선은 과거에 속한다. 왕정체제를 특징으로 하는 조선은 분명 그 명을 다했다. 하지만 조선사회의 구습은 우리 안에 남아 있다.

7. 주위를 둘러보면 조선은 과거이지만 심화되는 현실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의 심화로 사실상의 신분세습이 제도화되고 있다. 정치꾼들은 자신만의 권력체계를 영속화하려 한다. 왕이 없는 왕정을 꿈꾸는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자기 마음대로 정의하기 시작했다.

8.혹자에 따르면 한국사회는 현재 ‘헬조선’이다. 미래에 만나야 할 영원한 형벌과 과거에 사라진 줄 알았던 전근대적 구태가 만나 현재의 한국사회를 규정한다.

9. 그래서 헬조선은 ‘진즉 사라졌어야 할 과거(조선)’와 ‘살아 생전에는 겪지 말아야 할 미래’가 결합된 지금-여기다. 일상의 절반은 과거에 나머지 절반은 미래에 저당잡힌 채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이들에게 현재는 헬조선인 것이다.

10. 그런데 ‘헬’ 이후에 ‘조선’이 온다. 미래의 형벌 뒤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끔찍한 과거로의 퇴행이 기다리는 것이다.

11. 2015년 현재, 헬도 조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 우리 눈앞에 헬조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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