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기 보다는 반성할 일

왜 ‘통째로 필기하는 학생들’이 학점이 높은가?

다양한 요인이 있을 수 있으나 나는 (1) 대학이 제공하는 평가체제의 경직성과 (2) 학생들이 대학을 사회진출을 위한 단순한 도구로 인식하는 현상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비율이 정해져 있는 상대평가제’와 ‘학점만능주의’가 만나 아래 기사에 소개된 ‘결국 베끼는 놈이 이긴다’ 현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이다.

영어에 “At the end of the day”라는 말이 있다. ‘결국에 가서’, ‘종국에는’, ‘이런 저런 상황을 지나 마지막에 이르러 가장 중요한 것은’ 정도의 의미다. 교실에서 적지 않은 교수들은 열심히 가르치려고 하지만 학생들에게 결국 중요한 것은 성적표에 찍혀 나오는 학점이다. (일부 자격 없는 교수들의 문제를 가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학생들이 강의를 바라보는 관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즉, 학기를 마치며 최종적으로 남는 것(at the end of the semester)은 A, B, C 같은 알파벳 문자 하나고, 이것은 해당 학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와 관계 없이 취업과 진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대부분의 선생들은 이렇게 중차대한 문제에서 학생들과 논쟁을 벌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또한 학생들이 보기에 애매한 평가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갈등의 원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시험의 대부분은 수업시간에 다룬, 논쟁의 여지가 적은, ‘깔끔한’ 내용으로 채워진다.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한 장문의 에세이를 문제로 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하면 이 문제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나의 경험상 많은 학생들은 채점의 공정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것이고, 교수들은 이에 대해 ‘방어전’을 치루어야 할 것이다. 추가적인 노동과 감정적 동요 모두를 수반하는 일이다.

원칙적으로 교수들은 이 모든 조건을 받아 안고 대학교육의 이상을 실현해야 한다. 하지만 현 시기 상대평가제의 강압적 실시, 교강사들의 업무량, 학급당 학생수, 시험의 ‘객관성’에 대한 학생 및 학부모의 높은 기대, 시험과 관련된 감정노동의 기피 등을 고려한다면 대학다운 시험 및 평가체제의 도입은 어렵다. 이 상황에서 시험의 핵심은 수업 중 다룬 내용의 기계적 암기가 된다. 따라서 ‘잘 듣고, 잘 받아쓰는’ 학생이 좋은 학점을 받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한편 요즘 학생들은 할 일이 너무 많다. 대학이 제공하는 교육적 질문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토론하고 정리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스펙쌓기, 영어공부, 인턴, 아르바이트 등 수많은 ‘업무’ 속에서 정작 본업에 쓸 시간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연구와 비판, 창조’를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수업은 달갑지 않을 수밖에 없고, 시험공부는 ‘교수의 정리를 암기하는 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자신의 상황에 적합한 강의를 찾고 과도한 부담 없는 시험 체제를 요구하는 것은 ‘싸가지가 없는 요즘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무한경쟁 사회에서의 생존본능인 것이다.

그렇다면 잘 베끼는 학생이 최상위 점수를 받는 현상이 비단 서울대만의 문제일까?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공부법은 한국의 대부분 대학에서 유효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공부하는 존재를 만든 건 이 사회고 대학이다. 나도 그 책임에서 온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베끼는 자가 승리한다. (The copier takes it all.)’
놀라기 보다는 깊이 반성해야 할 일이다.

http://m.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243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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