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겠지

Posted by on Mar 5, 2016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건물을 빠져나오자 마자 달린다. 열차 출발 10분 전. 역까지 대략 10분 거리. 설렁 설렁 걷다가는 열차를 놓칠 판이다. 비는 쏟아지고 신호는 유난히 길다. 우산은 바람에 휘청거리고 조바심난 걸음은 젖은 길 위에 미끄러진다.

시장통을 거의 지났다. 모퉁이를 돌면 역이다. 흐흐… 탈 수 있을 것 같다. 우산 무리의 틈을 잰걸음으로 빠져나온다. 희망이 보인다. 그런데…

“퍼벅. 쿠당.”

노인 하나가 쓰러졌다.
어… 움직임이 없다.
정말 꿈쩍하지 않는다.
잽싸게 다가가 어깨를 흔든다.

“괜찮으세요?”
“…”
“괜찮으세요?”
“…”
“괜찮으세요? 괜찮으세요?”
“괜찮은…지… 모르겠어.”
“어디 다치신 거 같으세요?”
“모르겠어… 어… 모르겠어…”

아… 술냄새가 진동한다. 순간 나까지 취한 줄 알았다.

“아, 약주 하셨어요?”
“어…”
“…”
“많이 했지. 너무 많이… 했지.”
“일단 일어나 보세요. 걸으실 수 있겠어요?”
“모르겠어… 모르겠어… 모르겠어.”
“진짜 힘드시겠어요?”
“고마워… 고마워…”

팔을 잡고 일어서는데, 비는 사정없이 쏟아붓는데, 지금 휘날리게 달리지 않으면 열차는 바이바인데, 표는 출발 시간 지나서 환불이 안될지도 모르는데, 지금 이런 상황에서 표값 생각나는 나는 참 못난 사람인데, 이 어르신은 나 혼자 일으키기엔 너무 덩치가 큰데, 아 이놈의 비는 사정없이 쏟아지는데…

그 순간 들려온 한 노중년 사내의 목소리.

“(노인에게) 괜찮으신 겁니까? (나를 보며) 괜찮으신 거 같아요?”
“크게 다치시진 않은 거 같은데, 약주를 많이 하신 것 같아요.”
(술냄새를 맡은 사내) “아이고, 이런 날씨에는 약주를 적당히 하셔야죠.”
“그래야지. 그래야지.”
“비가 이렇게 오면 더 조심하셔야 되는데…”
“내가 너무 많이 먹었지. 비도 오는데, 너무 많이 먹었어. 너무 많이.”

사내와 힘을 합쳐 노인을 일으켜 세운다. 이제 사내와 노인의 대화.

“댁이 어디세요?”
“OO동, OO동.”
“그럼 택시 잡아 드릴까요?”
“아이구 고마워요. 고마워.”
“그럼 저쪽으로 좀 걸으시죠.”
“고마워. 고마워.”

노인을 겨우 부축해 큰길로 나왔다. 비는 지치지도 않고 쏟아 붓는데 제길, 빈 택시가 없다. ‘예약’ 사인을 건 차들이 무심히 스쳐간다. 그렇게 15분 쯤 흘렀을까.

“안되겠네. 콜택시를 불러야겠어요.”
“(사내의 2G폰을 흘끗 쳐다보며) 아 네 번호 있으시면 그렇게 해주세요.”
“‘뭐 차가 없다고요?” 어휴, 알았어요. 지금 주변에 차가 없다는데… 그냥 이게 젤 낫겠네.”

다시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사내.

“여기 옆 지구대에 연락했으니 곧 올 거예요. 이게 젤 나을 거 같네요.”

바닥에 다시 철퍼덕 앉은 노인은 연신 엄지를 치켜 세운다.

“좋은 일 하시는 거여, 좋은 일.”

그러더니 다시 고개를 떨군다.

10분 쯤 지났을까. 금새 나타날 줄 알았던 순찰차가 보이지 않는다. 내 다리에 기대다시피 한 노인은 자꾸만 내 운동화를 매만진다. 내려다 보니 젖은 신발끈을 가지런히 정돈하고 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 저기 오네, 저기.”

경찰차가 그렇게 반가왔던 건 태어나서 처음이다. 사내와 나는 경찰에게 상황보고를 한다. 어디 다쳤을 지도 모른다. 술을 많이 드신 것 같다. 좀 수고해 주시라. 잘 부탁드린다.

노인은 경찰차에 실려갔다. 그렇게 다가온 사내와 나의 작별시간.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 정말 좋은 일 하신 거야. 진짜로.”
“도와주셔서 한 거죠. 저는 여기 잘 몰라서요. 이제 기차타러 가야 돼요.”
“아 그래요? 그럼 얼른 가셔. 아무튼 좋은 일 하셨어.”
“고맙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역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오늘은 오랜만에 밥값은 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나쁘진 않다. 그래도 날린 표값은 아깝잖아. 그 생각에 환청인 듯 들려오는 내 바로 뒤 남녀의 대화.

“열차는 떠나도 환불이 다 돼요.”
“정말요?”
“네. 수수료 좀 내면 환불 다 되더라구요.”
“아 그렇구나. 좋네요.”

하마터면 뒤돌아서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넙죽 인사할 뻔했다. ㅎㅎㅎ

열차 안에서 인연 혹은 우연을 생각한다. 내가 워크숍에서 조금 일찍 나왔더라면, 시장통이 아닌 도로를 택했다면, 노인보다 조금 앞서 갔더라면…

그랬더라면 제시간에 열차를 탔겠지만 KTX 표는 시간이 지나도 환불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몰랐겠지. 그 인상좋은 사내와 ‘좋은 일 했다’며 서로를 추켜세울 일은 없었겠지. 무엇보다도 빗속에서 나의 신발끈을 매만지던 만취한 노인을 내려다 보는 일은 내 인생에 없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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