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의 대상이 된 강의 녹음 파일

Posted by on Mar 25, 2016 in 강의노트, 단상, 링크 | One Comment

1. 가장 불편했던 것은 녹음파일이 거래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었다. 극심한 학점경쟁 상황에서 ‘결석한 애들한테 왜 녹음파일을 줘야 돼?’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필기 안보여 주듯 녹음 파일을 혼자만 열심히 듣는 경우다. 그런데 돈을 받고 녹음파일을 넘긴다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현상의 핵심은 아니지만 페친분들 중에서 강의 녹음 파일에 대한 저작권 이슈를 정리해 주실 분이 계신지 모르겠다. 이쪽으로는 문외한이라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

2.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의 저자 이혜영 교수가 지적했듯 최고학점을 받는 비결은 교수의 말을 반복하는 것이다. 해석도 비판도 심지어는 축약이나 각색도 하지 않고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 그게 최선이다.

3. 적어도 영어과의 경우 이런 현상은 대학 강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국가가 학생들에게 EBS 지문을 달달 외워서 시험보도록 하지 않나? 심지어 영어지문의 한글 번역 텍스트를 달달 외우는 학원 수업도 있다. 중학교 수행평가 단골메뉴는 본문이나 다이얼로그 외워 말하기다.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말해야 만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가 ‘글로벌 창의 인재’같은 구호를 계속 외치니, 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4. 한 가지, 이게 대학 전반의 문제라고 단언하는 논조인데 적어도 내가 경험한 몇몇 학교에서는 극소수의 행태였다. 확인이 필요한 대목이다.

5. 조금 다른 이야기. 수업 중간 기말고사를 위해 과외를 받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카더라’ 통신이 아니라 목격자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법적인 문제야 뭐 있겠나 싶다. 당사자들 간에 맺어진 자유로운 계약인데. 그런데 가르치는 입장에서 보면 맘이 좋지 않다. 학업능력에 대한 평가를 거쳐 들어온 학생들이 다시 사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상황이 어색하고, 학업의 어려움을 경제력으로 해결하는 방식이 대학에까지 침투했다는 사실이 불편하다.

6. 학생들은 자신이 처한 입장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려고 한다. 그게 강의 녹음과 무차별 암기이건, 강의 녹음 파일을 거래하여 금전적 이익을 취하는 것이든. 그런데 이걸 일부 못된 학생들의 행태로 몰아가는 건 본질에서 벗어난 일이다. 대학 생활이 이 지경이 되기까지 대학은 교수는 무엇을 했나.

7. 솔직히 이런 글 읽을 때마다 무력함이 찾아온다.

8. 미국의 방식을 고려해 보자고 하는데… 몇년 전까지 교수들이 절대평가 할 수 있었다. 예습을 강제하는 거, 강의계획서에 명시하는 선생들 많다. 꼭 그게 ‘미국식’이라고 할 게 뭐 있나 싶다.

9. 학생들에게: 근데 내 강의는 녹음하지 말아라. 녹음해서 뭐하냐. 파일로 남기면 세상에 엔트로피만 증가할 뿐. 그리고 시험이 어려울 거 같으면 나한테 와라. 과외 같은 거 받지 말고. 너희가 낸 수업료로 추가 설명 모두 커버된다.

http://m.media.daum.net/m/media/society/newsview/20160325102705393

1 Comment

  1. 칠판맨
    March 25, 2016

    9. 사실 본질적으로 한국 대학에서 transmission view of education을 너무 잘 실천하고 있어서 강의를 녹음하는 것이긴 한데요, 다음과 같은 다른 이유도 있긴 합니다.
    A. 일방적인 강의식 수업에서는 수업 시간에 비해 attention span이 현저히 짧아서 중간중간 멍때리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잠깐 흐름을 놓치게 되면 내용 간의 연계성이 깨지게 되어 전체적인 재구성이 힘들어지죠. 이러한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녹음을 합니다.
    B. Attention span이 아무리 길다고 해도, 전달력이 좋지 않은 교수님들이 생각보다 많아서 ‘수업을 들어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 상황이 생각보다 자주 연출됩니다. 이러한 수업에서 강의 녹취는 일종의 보험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C. A/B를 종합해 보면, 일단 수업을 녹음하게 되면 마음이 굉장히 편해집니다. 물론 수업에 대한 집중/몰입도는 별개의 문제지만 말이죠.
    D. 녹음을 하게 되면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는 훨씬 규모가 큰) 일종의 power가 생깁니다. 이것을 돈을 받고 판다는 것이 사실 조금 의아하기는 하지만, 아무튼 녹취파일이라는 것이 헬조선의 대학생들에게 활용가치가 있기 때문이죠. (…공부만 하는 아웃사이더들에게 타인과 소통할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E. 녹음해도 어차피 공부 안 하는 놈은 다시 안 듣습니다.

    4. 그러한 점에서 선생님께서 녹음하는 학생들을 몇 명 못 봤다는 것은 선생님의 수업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 아주 솔직하게 말해서 그 점에 대해서 자부심 가지셔도 될 것 같습니다.

    Reply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