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디외 관련 쪽글 모음

Posted by on Apr 1, 2016 in 강의노트, 과학, 링크, 수업자료 | No Comments

그간 틈틈이 모아두었던 부르디외 관련 쪽글을 모아 보았습니다. 워낙 잡글들이라 일관성은 없습니다.
Habitus: 정의
“‘The habitus is not only a structuring structure, which organizes practices but also a structured structure: the principle of division into logical classes which organizes the perception of the social world is itself the product of internalization of the division into social classes.’ (1984: 170)
A good example might be language, and the ways in which certain forms of language bind people together in groups, or style in sub cultures (closely associated ‘cultural unconscious’, another of Bourdieu’s concepts). Thus habitus is the ‘principle that regulates the act,’ typified as ‘the system of modes of perception, of thinking, of appreciation and of action’ (Bourdieu in Jenks, 1993: 14).”
http://www.anti-thesis.net/contents/texts/notes/culture-bourdieu.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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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디외가 이야기한 문화자본은 전통적인 맑시즘에서의 경제적 수단으로 설명하기 힘들었던 사회의 동적 현상들을 설명해주는 데 알맞다. 홍성민(2004)에 따르면 부르디외의 상징적 폭력은 여러 가지 기제를 통해 사회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이것들은 너무나도 ‘우아한’ 것이어서, ‘폭력’이라고 부르기 힘든 것이다. 그는 상징적 폭력이 사회에서 ‘예술작품의 감상’, ‘사진작품의 감상’, ‘음악작품의 감상’, ‘소비패턴’, ‘미적 성향’ 등으로 전개됨을 밝히고 있다. 또한 이러한 상징적 폭력의 다양한 전개 형태는 학교교육이라는 강력한 매개를 통해 사회 구성원들에게 전수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부르디외의 지적을 한국사회에 적용해 보았을 때, ‘외국어의 습득과 구사’라는 것이 매우 강력한 상징적 폭력의 전개방식임을 깨닫게 된다.
학부모들은 대부분 아이들의 문화자본에 대해 ‘막연한 기대감’과 ‘막연한 공포심’을 동시에 가진다. 자기 아이에게 기회를 줄 수만 있다면 아이가 잘 해낼 거라는 믿음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아이에게 어떤 식으로 문화자본을 주입시키려고 해도 늘 ‘최상위층’에는 진입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후자에 속한다. 물론 이런 생각이 모든 학부모들의 특성은 아니다. 일부 학부모들은 대안적이고 독창적인 교육을 꿈꾸기도 하며, 영어교육을 아예 아이들의 선택에 맡기기도 한다.
문화자본에 대한 집착이 가져오는 폐해는 엄청나다. (물론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 혜택 또한 엄청나겠지만) 아이들을 ‘최고의’ 사교육으로 내모는 것이 부모로서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아이들도 이젠 그런 사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구체적으로 ‘옆집 친구는 네이티브랑 공부하는데, 우리 엄마는 나에게 왜 영어에 대해 아무 말씀도 안하실까?’ 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정말로 생겨나고 있다는 뜻이다.
아마도, 문화자본에 대한 이러한 집착은 매스미디어가 만들어낸 환상에의 직접적 반응, 학부모 커뮤니티 혹은 지역 커뮤니티에서의 활발한 정보 교환등에 의해 생겨나고 강화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이전에, 학부모 자신의 생애사가 영어의 필요성-혹은 영어라는 문화자본을 획득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불편함(그것이 실제적이든 내면화된 피해의식이든)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것은 이제 많은 학부모들이 이런 불편함으로부터 자녀들에게 문화자본을 ‘주입’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성공적인 문화자본 획득과 사용의 경험을 물려주려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교육특구’라고 하는 강남의 어머니들이나 큰 아이를 성공적으로 ‘세계시민’으로 만든 학부모들의 경우, 영어교육 전문가 못지 않은 학습방법론을 설파한다. 물론 학부모 커뮤니티에서의 성공 케이스나 ‘스타 엄마’의 영향력 또한 지대하다.
이런 현상을 바라볼 때, 영어교육의 정체성에 대한 거시적 접근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최근까지의 영어교육 분야는 ‘어떻게 영어를 잘 가르칠 것인가’, ‘어떻게 언어가 습득되는가?’라는 가치중립적(중립적인 것이 존재한다면!) 혹은 미시적 주제들에 관심을 가져왔다. 물론 영어교육에서 이 부분은 핵심적인 부분일 수밖에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와 함께 영어교육의 정체성을 조망하는 사회문화적 접근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연구를 진행함에 있어 부르디외의 재생산론이나 상징적 폭력 논의는 매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부르디외에 대한 책을 한 두권 읽은 지 어언 10여년이 넘어간다. 다시 한 번 브루디외를 들쳐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자본이 어떻게 생성/배분되는지, 그 과정에서 관련자(stakeholders)들의 정체성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그 정체성의 사회문화적 뿌리는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일을 해보고 싶다. 녹록치 않겠지만…
— 이걸 2006년에 쓰고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오늘 수업 시간에 다시 어설픈 부르디외를 꺼낸다.
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또 반응할까?
근본적으로,
우리는 스스로 체화한 자본을 가지고
스스로를 비판할 수 있는가?
2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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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디외의 문화자본에 관한 위키페이지. 부르디외(1986)에 따르면 문화자본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체화된 자본: 당신의 걸음걸이, 말투 등. 일시에 증여될 수 없으며, 장기간의 사회화 과정을 통해 전수됨.
2. 객관화된 자본: 책, 예술 작품, 사진 등 손에 만져지는 것들. 경제적 이익을 위해 물려줄 수 있는 것.
3. 제도화된 자본: 자격, 학위 등. 요즘으로 말하면 “스펙”에 대응하는 자본. 노동시장에서의 중요성이 큼.
http://en.wikipedia.org/wiki/Cultural_cap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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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디외에게 있어서 네 가지 자본 (Block 2007)
1. 경제자본 Economic Capital – 재정적 부와 수입.
2. 문화자본 Cultural Capital – 문화적 자원과 자산의 소유. 행동 패턴 (액센트나 태도), 특정 물 artifact (책이나 자격), 특정 기관과의 연계 (대학이나 전문직 기관)
3. 사회자본 Social Capital – 제도권과의 연계. 권력을 가진 (혹은 권력이 없는) 집단과의 연계 혹은 그에 속한 사람들을 앎으로서 갖게 되는 문화자본.
4. 상징자본 Symbolic Capital 흔히 위신, 평판, 명성 등으로 불리는 종류의 자본. 서로 다른 종류의 자본들이 “합법적 legitimate” 이라고 인정될 때 갖게 됨.
외국어의 습득은 2번 문화자본과 가장 밀접한 관련.
그러나 그 습득의 과정을 살핀다면 결국 1번 경제자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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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투스>, 어떤 해석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튀면 손해지’
‘눈치 잘 봐야 돼.’
‘분위기 망칠까봐서…’
‘원래 다들 그렇게 해요’
201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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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을 찬미하다: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의 금메달 수상 연설 (피에르 부르디외) <한국사회학> 제47집 제1호(2013년), pp. 1~14 중에서 발췌
“이 글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연설문이다. 부르디외는 1993년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에서 금메달을 받았는데, 이 원고는 그때의 연설 기록이며 20여 년 간 미공개되었다가 부르디외의 제자 로익 바캉이 추진하는 번역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학회지 <한국사회학>에 게재되었다. 번역은 『마음의 사회학』의 저자이기도 한 서울대 사회학과 김홍중 선생님이 해주셨다. 부르디외는 이 짧은 연설을 통해서 사회과학자가 왜 “개입”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해 날카롭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과학”을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CNRS에서 수여한 금메달을 받으며 개인적 기쁨을 누리기에 앞서, 저는 사회학에 대해 제기되는 몇 가지의 근본 문제들에 대해 성찰하고 싶습니다. 첫째, 사회학은 자신에게 고유한 방법, 개념, 모델들을 갖고 있는 견고한 경험 과학입니다. 사회학의 과학성이 종종 문제시되는 이유는, 사회학이, 상식에 기초하고 있고, 저널리즘적 정보와 가까운 비과학적 담론체계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과학성을 객관화시켜 성찰하는 급진적 자기-성찰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런 사회학의 성찰성은 과학장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의 형태로 다른 학문들에 대해 적용됩니다. 사회학은 과학적 인식을 절대시하는 대신, 과학장의 구조적 구성과 작동을 분석함으로써, 과학적 지식의 사회적 무의식을 비판적으로 드러냅니다. 셋째, 시장의 권력이 점점 더 강화되고, 국가가 과학을 시민을 조작하는 도구로 삼을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지는 이 시점에, 사회학은 비판적 대항-권력으로 기능할 수 있으며 또한 기능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사회학은 공적 서비스로서 스스로를 규정합니다.”
“진정으로 자율적이며 누적적으로 성장해가는 학문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과학적 사명에 십분 부합하기 위해서, 사회학은 무엇보다 성찰적이어야 합니다 (Bourdieu, 1982, 1993). 사회학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사회학은, 자기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시에 사회학의 기능이 지닌 과학적 논리를 교란시키는 사회적 효과들을 분석하고 장악하기 위해 사용가능한, 모든 인식 도구들을 가동시켜야 합니다. 이런 분석이 너무 추상적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호모 아카데미쿠스(Bourdieu, 1984)를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책에서, 저는 사회학 그리고 사회학이 그 안에 속해있는 제도들에 관해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그 당시의 제가 너무나 구체적이었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과학사회학은 사실, 우리를 반과학적 허무주의로 내몰지 않으면서도(시간부족으로 여기에서 충분한 증명을 제시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특정 학문을 그 역사적 또는 사회적 기원과 대면하게 합니다. 과학적 진리는, 결코 인간의 두뇌로부터 이미 완전히 무장한 채 솟구쳐 나온, 영원한 본질이 아닌 것입니다. 반대로 그것은, 매우 특별한 사회적 세계인 과학장(champ scientifique)의 강제와 통제 하에서, 그리고 그 세계의 규칙과 질서 속에서 성취된 특정 유형의 역사적 노동의, 역사적 산물들입니다. 분석을 통해서 만큼이나 자신의 존재 자체를 통해서, 사회학은 다른 학문들에게, 그들의 역사적 기원과 오류가능성(faillibilité), 그리고 잠정적 타당성의 원칙을 환기시킵니다(Bourdieu, 1975, 1991b, 2001). 그것이 아마도 사회학의 존재이유일 것입니다. 초월적 원리 위에 과학을 정초하려는 시도들이 매번 되풀이 되지만, 그런 시도들은 결국, 제임스 조이스가 묘사한 것처럼, 교황에 의해 선포된 무오류성(infaillibilité)의 자기 선언과 같은 순환 고리에 갇히게 된다는 사실을, 사회학은 역설합니다. 교황의 말은 그의 무오류성 때문에 결코 반박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사회학자가 권력에 봉사하는 전문가의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목적의 설정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사회학자는 정치가를 대신할 수 없으며, 대신하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예를 들어, 80퍼센트의 청소년들이 바칼로레아를 획득할 수 있도록 한다든가, 또는 취학아동 100퍼센트가 문자 독해 능력을 갖도록 만드는 것 등). 하지만 사회학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요구되는 경제적, 사회적 조건들에 대해서 전적으로 무지한 채, 오직 도달해야 할 그 목적만을 제시하는 사람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자기들이 추구한다고 믿는 결과와 정반대의 결과를 위험스럽게 좇아가는 그런 사람들에게, 객관적 조건을 환기시켜 주는 일입니다.”
“사회학은 자신을 공적 서비스(service public)로 정의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사회학이 ʻʻ사회ʼʼ 또는 사회의 대변자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를 통치하는 자들의 직접적 욕구에 직접적으로 응답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성찰성의 원칙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이 말을 빠뜨려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요컨대, 저는 오늘 이 연설의 결과에 대해서 어떤 환상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 연설을 하게 된 상황이 워낙 엄숙하다보니, 저도 엄숙한 어조를 취할 수밖에 없었고, 바로 그 이유로 제 이야기는 실현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희망한다는 것, 그것은 결코 금지되어 있지 않습니다.”

– 피에르 부르디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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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아래 경로를 통해서 읽게 됨.
“이 글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연설문이다. 부르디외는 1993년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에서 금메달을 받았는데, 이 원고는 그때의 연설 기록이며 20여 년 간 미공개되었다가 부르디외의 제자 로익 바캉이 추진하는 번역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학회지 <한국사회학>에 게재되었다. 번역은 『마음의 사회학』의 저자이기도 한 서울대 사회학과 김홍중 선생님이 해주셨다. 부르디외는 이 짧은 연설을 통해서 사회과학자가 왜 “개입”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해 날카롭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과학”을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http://oneitherside.tistory.com/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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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디외: 지식노동자가 특정한 장에 들어가는 것과 저항성간의 관계] 대중성은 치열한 노력의 산물로 획득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절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대중성과 저항 사이의 균형을 잡는 것은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일 지도 모르겠다.
“… 제가 주다노프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방법을 특별히 응용해 볼 수 있습니다. 문화생산자가 자율적이고 특수자본이 풍부하며, 그의 경쟁자만을 고객으로 하는 제한된 시작으로 배타적으로 향할수록, 그는 점점 더 저항적으로 되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대로 문화생산자가 대량생산의 시장을 지향하여 그의 문화상품을 생산할수록 그는 더욱 더 외부 권력, 국가, 교회, 정당 그리고 오늘날 저널리즘이나 텔레비전과 협력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들의 요구와 주문에 따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피에르 부르디외 저 현택수 옮김. <텔레비전에 대하여>. 1998. 동문선. pp. 106 –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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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dieu: 짧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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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자본론에 대한 고종석의 글.
“뒤르켐의 ‘사회화’ 개념을 손질한 것으로 보이는 아비튀스란 사회적 행위 주체의 행동 원칙이나 표상 원칙 들을 결정하는 일련의 획득된 기질, 성향 들이다. 아비튀스는 그 주체에게 의식되기도 하고 의식되지 않기도 한다. 그것은 사회적인 것이 한 개인에게 각인된 것이다.
말을 바꾸어 아비튀스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사회적 콘텍스트가 개인에게 가르친 성향·기질로서, 그것이 과거의 모든 경험들을 통합하면서 어떤 상황에서의 개인의 행동, 대상에 대한 개인의 인지와 평가를 매순간마다 틀짓는다. 개인의 역사 속에서 개인에게 획득되고 내면화한 성향의 체계로서 아비튀스는, 부르디외에 따르면 실천의 생산자이다.”
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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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별짓기에 대한 장봄의 글
“ 다시 부르디외의 아비투스의 정의로 되돌아가 보자.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를 객관적으로 분류 가능한 실천들의 발생원리인 동시에, 이 실천들의 분류체계(부르디외,2006 : 311)’라고 설명한다. 즉 사회세계를 ‘구조화하는 구조’임과 동시에 ‘구조화된 구조’로 설명한다. 특정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우리는 쉽게 ‘너 자신을 알라’ 혹은 ‘분수에 맞는 삶을 살아라’ 등의 말로 필요취향을 강요한다. 이미 규정되어버린, 자신의 취향이 사회적 위치에 의해 정해진 이들에게 아비투스는 이제 원리가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구조 안에 자신의 삶을 끼워 맞춰야 하는 것이 된다. 사회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빈곤층의 도덕성 논란과 그들에게 강요되는 문화는 그 속도가 너무 빨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인 부의 양극화 현상을 은폐한다. 또한 복지는 국민의 혈세를 갉아먹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한다. 그리고 명확해진 최빈곤층의 경계는 ‘그 나머지’ 사람들이 불안정한 삶의 질서를 승인하게 만들고, 빈자라는 가시적인 적을 설정함으로써 위태로운 사회를 ‘그럼에도’ 유지하게 하는 동력으로 작동한다. “
http://goo.gl/ojK4R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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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디외는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거의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하면 온갖 이슈에 숟가락을 얹는 지식인들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Bourdieu rarely spoke out on issues with which he was not familiar,” says the sociologist Franck Poupeau, who edited his Political Interventions. From social deprivation to industrial action, his commitment was linked to “a profound understanding of these issues”. So, he believes, “another Bourdieu would be possible now, but he would take a different form, that’s all.”
http://www.theguardian.com/world/2012/feb/21/pierre-bourdieu-philosophy-most-quo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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