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와 너비의 패러독스: 넓은 것이 깊다.

특정 강좌의 주제에서 얼마나 멀리까지 손을 뻗을 것인가. 수업 읽기 자료를 선정할 때마다 빠지는 고민이다. 예를 들어 다음 학기에 강의하게 될 (것 같은) <영어교육과 교육공학>의 읽기 범위는 대략 다음의 몇 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어느 수준에서든 한 학기 수업에 충분한 읽기 및 토론자료를 뽑아낼 수 있다.

1. 현재 한국의 영어교육에 직접 관련되는 자료와 기술 – 한국의 영어교육에서 당장 이슈가 되고 있는 교육공학적 담론과 관련 기술을 다룬다. 중고교 학교 현장에서 사용되고 있거나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영어교육의 4기능(듣기, 읽기, 말하기, 쓰기), 문법, 어휘 등의 영역과 연결하여 검토한다.

2. 컴퓨터를 이용한 영어교육(CALL, Computer-assisted language learning) 이론 전반: 한국 상황에 국한하지 않고 CALL 전반에 대한 이론 및 실제를 다룬다. 1에 비해 조금 넓은 주제를 다루지만 핵심은 여전히 ‘교육’에 있다. (스마트 교육이나 거꾸로 교실 관련 논의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3. 제2언어 교수학습이론: 제2언어습득을 비롯한 외국어 교수학습의 핵심 이론들을 다룬다. 특정 이론을 중심에 놓고 각각의 이론이 제시하는 최상의 교수학습환경을 구현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기술을 탐색하는 식으로 수업을 전개한다.

4. 일반적인 학습 및 발달 이론: 예를 들어 비고츠키의 중재(mediation)개념을 이해하고 이를 학습 및 발달의 관점에서 조망해 본다. ‘해법(solution)이 아닌 중재, 매개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에 대해 집중 토론한다.

5. 컴퓨터 기반 의사소통(CMC, Computer-mediated communication),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 관련 이론: 1-4와는 다르게 ‘교육’이라는 키워드에서 벗어나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디지털 기반 의사소통을 조망한다. 이를 통해 ‘언어교육공학’과 ‘리터러시의 변화’라는 두 주제를 통합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른다.

6. 인간-컴퓨터 인터페이스(HCI), 사용자 경험(UX) 및 디자인에 대한 논의: 예를 들어 Don Norman의 <The Design of Everyday Things> 같은 책을 읽으면서 디자인과 HCI, UX 등에 대한 토론을 해본다. 이를 통해 학습을 위한 공학적 설계를 포함하는 디자인 개념에 대해 고민해 본다.

7. 생태적 관점에서 본 기술, 학습, 발달: 생태적 관점에서 기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갖는다. 특히 깁슨 등이 제시한 어포던스(affordances)의 개념을 중심으로 현재 활용되고 있는 다양한 기술을 평가하고 개선점을 도출한다.

사실 3년 전 이 수업을 했을 때 학생들의 반응은 갈렸다. 일일이 확인하진 못했지만 몇몇은 다양한 소프트웨어/기술에 대한 지식과 경험의 부족으로 애를 먹었고, 몇몇은 ‘하나의 일관된 주제로 수렴되지 않는’ 수업 내용에 불만을 표출했다. 나 또한 <영어교육과 교육공학>을 지나치게 기능적인 과목으로 파악하는 우를 범했다. 학생들의 지적 호기심과 잠재력을 “효과적인 영어공부”라는 틀에 가두어 놓지 않았나 하는 반성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수업을 준비하면서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흡인력을 유지하면서 한 학기 수업을 이끌만한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다. 너비와 깊이를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이야기가 절실하다. 몇몇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4-7번과 같은 논의가 강의명과 동떨어진 내용으로 인식될 수 있겠지만, 결국 교육과 기술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지과정, 디자인, 발달, 어포던스, 리터러시의 본질 등의 개념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깊이’와 ‘넓이’는 상충되는 개념이 아니라 변증적 관계 속에서 서로의 성격을 규정하는 사이다.

(그런데 난 왜 다음 주 수업 준비를 안하고 다음 학기 걱정을 하고 앉아 있는 건가. 미루기의 죄책감을 씻어내기 위한 의례적 글쓰기인가.)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