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Posted by on Oct 5, 2016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세상을 객관적으로 볼 능력은 없다. 갈수록 객관적이라는 게 뭔지도 잘 모르겠다. ‘중립은 없다’는 식의 선언을 하려는 건 아니다. (사회적 이슈에 있어서) 객관적이라는 게 정말 뭔지 모르겠다는 뜻이다.

객관에 대한 기준이 애매하다 해서 편향을 알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편향은 분명 존재하며 때론 악랄하다. ‘악의 평범성’이 있지만, 평범한 사람이 넘기 힘든 악함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요 며칠 타임라인에서 ‘눈을 씻어야 할’ 포스트로 지목된 글들을 접하면서 든 생각이다.

이들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한 방향으로 흐르는, 즉 외부로만 향하는 말이다. 성찰의 흔적은 없고 메아리의 가능성마저 차단된, 껍질은 누구에겐가 전하려는 말이지만 내용은 배설에 불과한, 그런 말.

말은 언제나 양방향이다. 의사소통을 위해 여러 사람이 말을 주고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입을 떼는 순간 말은 상대를 향함과 동시에 화자의 내면을 향한다는 것,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가에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는 뜻이다. 이런 면에서 말은 늘 외부와 내부를 동시에 겨냥한다.

사랑하는 가족을 보낸 유족들은 누구보다 큰 슬픔 속에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입술을 떼기조차 힘들다. 깊은 슬픔을 지나는 이들에게 말이 갖는 힘은 미미하다는 걸 알기에 우린 침묵한다. 인사를 건네고 예를 갖추고 포옹을 한다. 기껏해야 속으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군요. 힘내라는 말도, 괜찮을 거라는 말도 지금은 어떤 의미도 없네요’라고 중얼거리는 게 전부다. 그렇게 침묵으로, 거기 있음으로 소통할 뿐이다.

반면 어떤 이들의 말은 거침이 없다. 신문기사에 던져진 말 한두 마디를 가지고 꺼이 꺼이 우는 이들의 상처를 헤집고, 수십 년 켜켜이 쌓아온 관계를, 사랑을 제 맘대로 부숴버린다. 복잡다단한 사건의 경과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왕좌’에 자신을 앉힌다. 자기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자리. 말이 무소불위의 능력을 갖게 되는 자리. 상대를 악마로 만드는 동안 자신이 악마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한없이 불쌍한 자리.

자기 목소리를 듣지못하는 사람들, 타자화(othering)가 자기 분열임을 깨닫지 못하는 이들에게 세상은 온통 프레임 투성이다. 하지만 그런 틀에 갇히지 않는, 아니 그 틀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삶이, 사랑이, 죽음을 넘는 생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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