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슨하지만 꽉찬 관계

중학생들과 전치사를 배운다.

“자자. 여기 보세요. go to work. 이건 무슨 뜻일까요?”
“…”
“go to school 있잖아요. 학교가다. 그니까 이건?”
“일하러 가다?”
“맞아요. 일하러 가다. 직장에 가다. 따라해 보세요. Go to work.”
“Go to work.”
“그럼 go to work랑 go to school 중에서 뭐가 더 나은 거 같아요?”
“둘다 가기 싫은데… / 학교 가는 데 돈 주는 거?”
“ㅎㅎㅎㅎㅎ”

===

“전치사, 여기 보니까 처음에 시간의 전치사, 뒤에 장소의 전치사가 나오네요.”
“네.”
“근데 전치사들 한번 비교해 보세요. 시간에 쓰이는 거랑, 장소에 쓰이는 것들…”
(학생들이 대~충 페이지를 흝어본다.)
“이게 사실 비슷하죠? On, in, at, before…”
“그러네요.”
“이게 왜 그럴까요?” (질문 던져놓고 순간 아차… 넘 어려운 걸 물어봤네. ㅠㅠ)
“…. (멀뚱멀뚱)”
“좀 어려울 수도 있는데 한번 듣고 흘려요. ㅎㅎㅎ (아 멋적어) 시간이라는 게 뭘까요? (아 점점 미궁으로 빠져드는데~) 이게 시계를 보면 시간이 가고, 나이가 들고 그런 건 눈에 보이는데 ‘시간이 뭐냐’고 하면 사실 할말이 없거든요.”
“…. (계속 멀뚱멀뚱)”
“그래서 시간을 나타낼 때 우리가 볼 수 있는 거, 실제 경험할 수 있는 걸로 이야기를 하죠. 그게 바로 장소죠.”
“”…. (계속 멀멀뚱뚱)”
“At the corner 라고도 하지만 at 7 o’clock 이라고도 하잖아요. From 망원동 to 합정동, 이라고도 하지만 from 4:30 to 5:30 라고도 하고요.”
“네 그쵸.” (나: 아 드디어 대답을 했다!)”
“그렇게 장소를 나타내는 말을 가지고 시간을 표현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제 끝내야지) 암튼 (<– 급히 말 맺을 때 나의 습관) 시간이랑 장소에 대해 말할 때 전치사가 쓰이고, 걔네들이 비슷비슷하다는 것만 알아두세요.”
“네.”

===

“Strange but interesting 나왔네요. Strange는?”
“이상한!”
“그쵸. 그니까 ‘이상하지만 재미있는’이라는 뜻이겠죠? 이거 보니까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생각나요. 저도 봤거든요.”
“재밌죠?”
“네. 재미있던데요? 팀버튼 영화가 좀 strange but interesting 하죠.”
“네. 이상한 애들이 좀 나오죠. ㅎㅎㅎ”
“아 그러고 보니까 Dr. Strange도 곧 나온다고 하던데.”
학생 중 하나: “(완전 실망한 투로) 아 그거 번역을 박OO가 한대요.”
“아 그 사람이 어떤데요?”
“번역을 디게 못하거든요. 여혐 번역도 많고.”
“아…”
“그래서 별로예요.”
“아 그럼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네요.”
“???”
“번역 없이 영화 보면 좋잖아요.”
“……”

===

금요일 오후를 거의 늘 이렇게 보낸다. 방전되기 일보 직전에 만나는 친구들. 갈 때는 몸이 천근만근이지만 나올 때는 조금 덜 무거운 것도 같다.

왜 그런가 생각해 봤더니 주고받는 관계이지만 서로에게 매이지 않기 때문 아닐까 싶다. 나는 친구들로부터 배우고 친구들은 나에게 배우지만 서로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 관계. 숙제도, 강의료도, 시험도, 내신도 없다. 책을 안가져와도 오케이. 딴 소리를 좀 해도 오케이. 사정이 생기면 미리 연락하고 안오면 그만. 하지만 그게 서로에 대한 신뢰의 부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여태껏 그래왔듯 계속 만날 것이라 다들 믿고 있으니… 물론 이 관계도 언제 툭 끊길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어디 관계 뿐이랴.

계약과 구속이 들어설 틈 없는 느슨한 관계들이 좀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느슨하지만 꽉찬 관계들이랄까…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