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테일의 힘 vs. 선언의 무력함

Posted by on Oct 20, 2016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삶이 힘겨울 때, 자세히 말할 기운마저 잃는다. 좀더 정확히 말해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순간 삶이 더더욱 힘겨워진다. 그래서 택하는 것이 선언이다. 주워온 아포리즘, 암호같은 경구, 맥락을 상실한 토막글, 무언가 말했지만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은 유령글, 현실을 잡아내기엔 너무나도 성긴 그물글이 많아진다.

요즘의 내가 이렇다.

선언은 본래 널리 퍼져나감을 겨냥한다. 타인에게 닿아야 한다. 하지만 침잠하는 삶 속에서 선언은 내면의 찻잔 속 태풍이다. 마음 모퉁이 몇 군데를 튕기다가 누군가의 마음에 닿기도 전에 사라진다. 더 큰 세계를 향해 떠났지만 뭉툭하기 짝이 없는 말들이 끼어들 현실은 없다.

디테일은 작은 것이지만 그것을 관찰하고 만들어내는 일은 깊고도 넓은 시선을 고집하는 이들의 것이다. 어두움에 익숙해지기 위해 암흑 속에서도 눈 부릅뜨고 세상을 직시하는 이들 말이다. 나아가 아름답고 편하며 즐거운 것에 시선을 고정하지 않는이들에게만 균형잡힌 디테일이 허락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쁜 풀꽃처럼 자세히 볼수록 더러운 것들이 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가.

잔인하고 추악하며 우둔하기까지 한 디테일의 향연 속에서 선언하지 않고 버텨내기 힘든 나날이 이어진다. 눈 질끈 감고 돌아서고 싶어진다. 그래서 더더욱 잔혹한 시대에서도 디테일을 잃지 않는 이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너무 잦은 선언으로 무력해지는 마음의 균형을 잡게 해주시는 분들,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깨닫게 해주시는 분들 말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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