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의어의 세계, 아이덴티티의 세계

예전에 중학생 친구들을 가르칠 때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 이거 왜 이렇게 뜻이 많아요? 얼마나 많이 외워야 되요?”
“그치? 단어 하나에 뜻이 너무 많지?”
“네네. 영어 짜증나요.”
“ㅎㅎㅎㅎㅎ”

단순하지만 언어가 작동하는 핵심 원리 중 하나인 “다의어 polysemy”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단어가 하나의 뜻에 그치지 않고 여러 뜻을 가진다는 사실은 인간의 인지능력과 어휘-맥락의 작동방식을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단초가 됩니다. 이에 저는 저 순간을 의미 있는 교수 기회(teachable moment)로 삼았습니다. 아울러 짜증나게 영어만 그렇다는 생각은 외국어에 대한 상위인지의 허점을 드러내 주는 대목이었기에 간단한 과제로 대응해 보았습니다.

사회적 아이덴티티와 다의어

중학생들에게 다의어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언어학 이론을 그대로 가져오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양한 사회적 역할과 아이덴티티의 변화를 비유로 들었습니다. 대충 이런 식이었죠.

“우리가 속한 사회 집단을 생각해 보면 보통 몇 개, 많게는 수십 개가 되죠. 반, 학교, 직장, 학원, 집, 종교 단체, 동호회, 동문회, 향우회, 친구 모임, 각종 게임 서버, 소셜 네트워크, 온라인 커뮤니티 등등등. 각각의 그룹에서 우리의 모습은 조금씩 다를 겁니다. 단체의 성격에 따라, 그 단체에 속해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따라, 거기에서 맡고 있는 역할에 따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해되길 바라는 지에 따라, 무엇보다도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말과 행동, 옷차림까지 달라지죠.

다시 말해 우리 각자는 한 사람이지만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정체성(identity)을 발현합니다. 한 사람이지만 그 모습은 시시각각 변하죠. 그렇다고 몇 초 단위로 성격이 달라지면 위험하겠죠? 그야말로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테니까요. 물론 이게 안되어도 큰일입니다. 왜 큰일이냐고요? 가족에게 하는 말과 행동 그대로를 담임선생님이나 학급 친구들한테 해보시면 왜 큰일인지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단어라고 하더라도 다양한 상황에 쓰이게 되죠. 각각의 상황마다 그 단어의 행동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어울리는 단어나 문법도 조금씩 달라지는 거죠. 상황에 따라 어울리는 친구들(collocation, 연어)이나 모이는 방식(structure, 문법)이 달라지니 결국 그 뜻이 달라지게 됩니다.

결국 맥락 context 과 쓰임 use 에 따라서 단어의 뜻이 변화하는데, 이 변화의 패턴을 잘 정리해 놓은 것이 사전에 등재된 단어의 여러 뜻입니다.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은 다양한 상황에서 출현하는 단어들을 모아서 이것들을 정밀하게 구분하는 역할을 해요. 그래서 사전 편찬자들을 제일 머리아프게 하는 건 ‘애매하게 쓰인’ 단어들이예요.

여기에서 재미난 현상이 발견됩니다. 잘 보면 사전에서 뜻이 많은 단어는 별별 맥락에서 다 사용되는 단어들이예요. 예를 들면 동사 중에서 ‘take’나 ‘get’같은 걸 보시면 보통 수십 개의 뜻이 나오죠. 오만 가지 상황에서 굉장히 다양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여러 가지 뜻을 표현할 수가 있는 거죠. 그래서 take나 get 같은 건 뚜렷한 개성이 별로 없어요. 좋게 말하면 유연성이 뛰어난 녀석들이고, 나쁘게 말하면 두루뭉술의 대가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근데 이 단어를 보세요. Protanopia. 아마 못들어 보셨을 거예요. ‘적색맹’이라는 뜻이예요. 다양한 색맹 증상 중 하나죠. 여러분 적색맹이라는 말 자주 사용하세요?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집에서도 포켓몬 고 할때도 사용하나요? 아니죠. 적색맹이라는 말은 의학용어로 아주 특별한 상황에서만 사용되겠죠? 그래서 사전을 찾으면 ‘적색맹’ 혹은 ‘제1색맹’ 같이 딱 하나의 뜻으로 풀이되어 있어요. 겹치기 출연 안하고 자기가 나올 데를 딱 아는 거죠. 이런 단어들은 출현 빈도는 낮은데, 성격이 뚜렷해요.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get 같은 친구와는 다른 거죠. ㅎㅎㅎ

자 이제 왜 어떤 단어들은 그렇게 뜻이 많은지 아시겠죠?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시면 어떤 단어에 뜻이 많은 이유를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아 가기 전에 한 가지 과제를 드릴게요. 정말 영어 단어만 그렇게 뜻이 많은 걸까요? 우리말 단어들은 안 그럴까요? 집에 가서 국어사전을 찾아 보세요. 예를 들어 ‘가다’를 찾아보면 어떨까요? 뜻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고 다음 시간에 같이 이야기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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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읽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더 넓은 아량(?)으로 국어사전에서 ‘가다’를 찾아보시면 어떨까요?

전 이만 갑니다. 명절이 벌써 다 간 느낌이네요. 아까 마신 커피의 카페인발이 너무 오래 가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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