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고 밥벌이하며 살아간다는 것

지금은 새벽 두 시 이십 칠 분. 하루 종일 두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나는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과 쓰나미 소식, 다른 하나는 한 지인의 양심적 병역거부 결단 소식입니다. 지진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계속 뉴스를 보게 되고 글을 읽게 됩니다. 평화주의자로 살기로 마음먹은 그 친구의 얼굴이 자꾸 떠오릅니다. 마음은 정처없이 부유하고, 그런 마음의 조각들을 하나 하나 연착륙시켜 보려는 시도도 잘 되지 않더군요. 친구를 위해 노래를 하나 연주하고 새로 구입한 책을 조금 읽다 덮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새벽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제 재난과 병역거부에 대한 생각에서 조금 비껴나 어제 지도교수와 한 이야기를 곰곰히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터라 졸업 이야기가 어쩌다 나옵니다. 어제도 졸업 후 미국에 남아있게 될 가능성이 있는지, 어떤 쪽으로 진로를 결정할 것인지 등등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우선 저는 대학에 남는 것에 관심이 있지만, 대학에 남는 것이 학자로서 살아가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저에게 가장 좋은 학자는 세계를 깊이 성찰하고, 성찰의 과정 속에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이런 성찰과 소통을 연대로 이어내는 사람입니다. 특히나 교육과 언어학, 심리학과 인류학 등이 ‘짬뽕된” 응용언어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고 있기에, 삶에 대한 이해와 개입이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한편으로 저는 밥벌이에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관심이 많다 함은, 밥을 먹을 수 있는 최소한의 직업을 반드시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밥벌이라는 표현은 저에게 비루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내 삶을 지탱하고 제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정도의 돈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제 앞가림은 꼭 한다’는 생각인 것이지요. 사실 (절대적으로는 아니겠지만) 나름 힘들었던 시절을 겪은 후로 가난이 개인과 관계에 대해 미칠 수 있는 엄청난 파괴력을 간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저와 지도교수 이야기를 잠깐 해야겠습니다. 저는 지도교수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존경의 이유는 간단합니다. 한 분야를 개척한 “대가” (이 단어가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주 쓰는 표현이라 빌려 씁니다) 이기도 하지만 훌륭한 교육자이며, 근본적으로는 정말 좋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지도교수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제가 언제 졸업을 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졸업과 관계 없이 지도교수가 제 삶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 같습니다.

어제 이야기를 하던 도중, 지도교수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연구를 하는 학자로 남고 싶냐고. 저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연구하고 실천하면서 살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연구 research 중심 대학으로 가려고 생각해 보면 지금 출판한 것이 하나도 없고 슬슬 걱정도 된다고. (물론 저는 졸업만 해도 행복할 거라는 생각을 아주 강하게 갖고 있습니다. 꼭 연구중심 대학에 가려는 생각도 없고요.)

지도교수가 말했습니다. 대략 이런 이야기였죠.

“정말 연구자로 살아가고 싶다면 어떤 기관이든 들어가서 계속 연구를 해라. 요즘 학생들은 연구중심 대학에 바로 가려고 하는 생각이 많은 거 같다. 너무 고른다. 하지만 평생 연구하는 삶을 살려고 한다면 교육 중심 대학 teaching school 으로 가서 연구를 하면 된다. 거기서 시작하는 거다. 그리고 열심히 해서 원하는 대학으로 옮겨갈 수 있는 길을 만들면 된다. 물론 가르치는 일이 즐겁다면 거기에서 학생들과 소통하면서 즐겁게 살면 되는 것이고.”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내가 이 학교에 오기까지 5번 학교를 옮겼다. 처음에 간 학교는 아주 작은 지방의 학교였다. 나는 가족이 있었고, 경제적으로 책임을 져야 했다. 누구든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연구중심 대학에 가야 연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라. 연구자로 살고 싶다면 어디든 가서 연구를 하면 된다. 그런데 너는 한국이나 미국이나 어느 쪽으로 갈 생각을 하고 있는가?”

저는 말했습니다. “I’ll go wherever they pay me.” (월급 주는 데로 가야죠.)

지도교수가 웃더군요. 그리고 말을 이어갔습니다.

“좋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어디로 가는가에 너무 가치를 두는 건 좋지 않다. 그리고 만약 네가 진정한 연구자로 살려면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그건 하루의 일정 시간을 읽고 쓰는 데 할애하는 일이다. 학교 사정이나 집안 사정, 혹은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반드시 일정 시간을 읽고 쓰는 데 써야 한다. 물론 이게 쉽지는 않다. 상황이 어려워질 수 있다. 그러나 정말 학자로 살아가려 한다면 삶의 고난이 와도 이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이들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 일 때문에 다른 일을 전혀 하지 못한다. 나는 운이 좋아서 이걸 할 수 있었다. 사실 이렇게 시간에 “파티션을 치는 것”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참고로 지도교수는 매우 진보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실천과 이론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이 시간을 꾸준히 확보하지 않으면 학계 academia 에서 네가 원하는 일을 꾸준히 하긴 힘들다.”

이제 새벽 세 시를 지나고 있습니다. 어제의 대화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반성해 봅니다. 사실 많은 세월 동안 사회 정치적 이슈와 씨름하면서 살아왔고, 이를 후회하진 않습니다. 앞으로도 삶의 본질적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러한 삶의 문제들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나아가 그 삶 속의 많은 이들과 연대하기 위해 제가 정말 해야 할 일은 스스로를 세상에 도움이 되는 도구로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튼튼하고 쓸모있는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하고 있는 일 (공부라고 불리는!)의 핵심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핵심을 위해 매진해야 하고, 잘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할까라는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무얼까. 지도교수의 말 속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삶의 일정 부분을 늘 읽고 쓰는 데 쓰는 것. 그리고 마음 아픈 일이 있고 힘든 일이 있어도 결코 이 공부의 시간을 양보하지 않는 것. 하지만 그 공부의 시간을 통해 ‘명예’를 얻거나 ‘좋은 연구 중심 대학’에 가기 위해 쓰지 않는 것.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시간의 파티션”을 치는 것.

가끔 어머니와 통화하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어머니는 꼭 졸업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물론 가끔은 이왕 4년 한 거 마치고 오라는 말씀도 ㅠㅠ) 교사 자격증이 있으니 임용 시험을 보거나 사립학교에 지원해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지 않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맞장구를 칩니다. 밥을 먹을 수 있고 나쁜 짓 하는 거 아니면 그거 하고 살면 된다고. 저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면 된다고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쓸모있는 사람이 되는 것과 공부를 하는 것이 꼭 다른 길이 아닐 거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공부해서 남주냐고 말하는 게 아니라 남주려고 공부하는 삶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에 파묻히는 공부가 아니라 나를 세계로 덮어버리는 공부도 가능할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위해 일상의 행복을 접는 게 아니라, 공부를 통해 일상에서 더 깊은 행복을 맛보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이전과 같지 않다”는 말처럼, 내가 사랑하는 말과 사람의 세계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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