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논문쓰기> 첫 번째 수업 후기

1. 분주했다. 전날 밤에 다 준비해 놓은 것들을 세팅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빠듯했다. 진짜 다됐다 싶었는데 물을 준비하지 못해 부리나케 나가 사왔다. 어리버리 첫 시도, 집 가까이에 강의장소를 잡은 건 잘한 일이었다. 다음에는 시간이나 장소, 각종 물품 준비 면에서 좀더 여유있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다. 주도면밀하지 못하니 차근차근 배울 수밖에 없겠다.

2. 친절하게 전화를 받아주신 코디네이터 분의 말씀과는 다르게 프로젝터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분명 “프로젝터가 있죠?”라고 물었고, “그렇다”고 답했는데, 그럼 강사가 프로젝터를 사용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닌가? 수업 직전에 겨우 들어온 프로젝터. 게다가 스크린이 없어 녹색 칠판에 띄워야 했다. 다음 주에는 전지를 붙여야 할까. 강의용으로 마련한 공간이 이렇게 허술하다니. 몇년 안된 건물임을 감안하면 여전히 이해 불가다.

3. 이제껏 영어교육과, 영어영문학과, 경영학과 등에서 강의를 해왔는데 신청하신 분들의 전공을 보니 인류학, 의학, 작업치료, 경영학, 국제원조, 영어교육, 보건정책, 인지신경과학, 통번역학, 교육학, 예술경영 등 참으로 다양했다. 언제 이런 영광스런 기회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벅찬 마음과 함께 다양한 필요에 최적화된 강의를 만들기는 힘들 거라는 우려가 동시에 들었다. 이왕 저질러진 일. 실패하겠지만 되도록 멋지게 실패하는 걸로, 쿨럭. ;;;

4. 수강생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대학 및 대학원에서 논문쓰기 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를 포함한 거의 모든 대학원생들은 논문쓰기를 ‘눈치’로 배웠다. 극히 일부지만 맨땅에 헤딩으로 논문을 배우는 게 맞다고, 자신들도 그렇게 배웠다고, 못배우면 학생들의 노력 부족 탓이라고 굳게 믿는 교수들도 있다.

5. 사실 체계적 훈련기회가 주어지지않는 건 한국 뿐만이 아니다. 미국, 캐나다의 몇몇 대학원에서도 같은 현상을 목격했다. 다만 북미의 경우 중고교에서의 글쓰기 교육이 한국보다는 좀더 활성화되어 있다는 것. 하지만 논문작성이 지독한 안개 속 길찾기와 같다는 점은 대동소이해 보인다. PhD Comics의 많은 에피소드가 논문쓰기의 어려움을 그리고 있음은 우연이 아니다.

6. 학술적 글쓰기 교수의 가장 좋은 모델은 나와 같은 응용언어학 관련 전공자와 해당 분야(의학, 경영학, 사회과학 등) 전문가가 협업하여 커리큘럼을 만들고 함께 가르치는 것이다. 재정적 지원이 충분하다면 언어학자-해당분야 학자 팀과 대학 내의 글쓰기 센터(writing center)가 협업하여 커리큘럼, 강좌 운영 노하우, 해당 강좌의 학생 과제들을 아카이빙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대학 글쓰기 교육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고 본다.

7.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다. 우선 모두가 각자의 일에 바쁘다. 살아남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거다. 쉽게 말해, 글쓰기 커리큘럼 개발을 위해서는 시간과 돈이 필요한데 시간도 돈도 없다. 개인적인 희생(?)을 통해 커리큘럼이 개발된다 해도 인센티브가 주어지지 않는 풍토다. 결국 생각만 하다가 그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8. 언젠가 분과학문의 학술적 글쓰기 커리큘럼 개발을 위한 공동 프로젝트 같은 걸 해보고 싶다. 내일 AI가 인간보다 논문을 더 잘 쓸 거란 걸 알더라도, 오늘 진지하게 글쓰기를 가르치겠다… 뭐, 이런?

9. 서울 뿐 아니라 경기도 각지, 대전, 강원도, 심지어 제주도에서까지 와주셔서 감사했다. 모두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신 덕분에 덜 떨면서 강의를 했다. 볼펜과 천혜향을 나누어 주신 분들로 수업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강사의 부족함을 메워주시는 수강생 분들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10. 세 시간이 금방 갔다. 앞으로 3주도 그렇게 휙 가버릴 것 같다. 스쳐가는 인연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밤이다.

강의를 열기 잘 한 것 같다. 많이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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