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택트(Arrival) 잡설 (진짜 잡설) (스포일러 있음)

1. Arrival의 원작인 <Story of Your Life>는 나레이션 형식으로 진행된다. “I remember”가 자주 등장해서 세보니 약 12번.
 
2. 우리가 보통 remember를 쓰는 것은 다음 두 상황이다.
 
(1) 현재 말하는 시점보다 앞서 일어난 일. 즉 과거의 일.
(2) 현재 말하는 시점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 즉, 미래의 일.
 
따라서 영어를 기준으로 remember 다음에는 I remember that I did that. 이나 I remember that I will have to do it. 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물론 remember 다음에 조금 다른 내용이 올 수도 있다. Remember you are a teacher.라는 말은 “너의 상태(지위)를 잊지 말아라”는 뜻이 될 것이다.
 
3. Arrival의 나레이션 중 다수는 “나는 네가 …할 것이라는 걸 기억한다”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희한하다. 분명 기억하고(remember) 있는데, “~했던 것”도 아니고, “(일어나지 않았지만) ~할 것”도 아니다. 인간의 언어에 존재하지 않는 내용 형식인 “(이미 일어난 일인데) ~할 것이라는 걸 기억한다”이다.
 
4. <과거-현재-미래>가 방향이 있는 직선이 아닌 하나의 평면에 들어올 때 Remember는 Know와 동의어가 된다.
 
기억하는 것과 아는 것의 구분이 없어진 세계. 예측도 없고 회상도 없는, 모든 것이 ‘지금’인 세계.
 
5. 그렇다면 필자가 쓴 “이미”, “과거”, “미래” 등의 단어는 쓸모가없어지는 세계.
 
6. 하지만 이런 세계를 경험하고 체화한 것은 주인공 루이스일 뿐, 다른 이들은 이 세계를 이처럼 인식하지 않는다.
 
7. 여기에서 또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Remember = Know”인 사람과, 이 두 가지가 구분되는 사람 사이의 소통은 가능한가?
 
8. 언젠가 기술이 발전하여 인간의 뇌가 생성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초고해상도로 스캔하고 이를 집적된 정보시스템으로 만들면, 이 시스템은 일종의 ‘헵타포드적’ 인지를 할 수 있을까?
 
9. 한편 언어 자체가 헵타포드적 성격을 띄고 있지 않나? 수많은 시간을 고스란히 흔적으로 담고 있는 시스템. 하나의 노드가 전체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토폴로지. 공시성과 통시성이 엇갈리는 하나의 점.
 
10. 꿈 속에서 다음 날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있는 나를 만나고, 프리젠테이션을 하면서 계속해서 데자뷔를 느끼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고, 이를 읽은 누군가가 기억하고, 그 사람이 몇 년 후에 원작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로 착각하는 상황에 이르고…
 
11. 간만에 잡설다운 잡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