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식 억양의 좋은 점(?)

내 영어에는 한국어 악센트가 짙게 배어 있다. 중학교 입학 직전 영어를 처음 접했고 중고등학교 내내 영어를 글로 배웠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지만, 테이프 속 낯선 외국인의 발음을 그대로 따라하는 일에 대해 가졌던 반감 탓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돌아보면 ‘열심히 따라했어도 한국 억양을 없애진 못했을텐데’라는 생각과 ‘내 일 할 만큼 하면 됐지’하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소위 ‘국내파’였지만 영어에 상당한 소질을 보였던 학생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영어에 재미를 붙여 꾸준히 공부했고, 영어로 된 책을 스스로 찾아가며 읽었다. 주변 사람들 눈에도 빼어난 언어습득 능력이었다. 그의 영어사랑은 부모님마저 감동시켰고, 중학교 어느 여름 방학에 한 미국 ‘명문대’의 영어캠프에 갈 기회까지 얻었다.

수업이 시작된 지 며칠, 한 교수가 영어공부에 대한 궁금증과 고민을 풀어주려 개별 면담을 진행하였다. 교수는 영어공부에서 가장 고민이 되는 부분을 물었고 학생은 주저없이 ‘한국식 억양이요!’라고 대답했다.

교수는 깜짝 놀라며 “너의 발음을 명료하고 알아듣기 쉬워. 한국어 억양이 조금 느껴지긴 하지만 미미할 뿐더러 소통에 전혀 지장이 되지 않아. 오히려 너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 주는 강점으로 생각될 정도인데?”라고 답했다.

아 어떤 게 맞는 길일까. 고민을 풀기 위해 상담을 신청했으나 학생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하지만 이후 발음에 대한 고민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영어공부의 큰 짐을 내려놓은 것이다.

의사소통의 민족지학 전문가인 사빌-트로이케에 따르면 비원어민 화자는 ‘너무 원어민같은’ 발음을 따라하지 말라는 충고를 받기도 한다. 원어민에 가까운 발음을 구사할 경우 원어민과 같은 언어능력을 가진 것으로 판단되며, 맥락에 따라 적확한 언어를 구사하는 화용(pragmatics)능력을 비롯하여 해당 언어/문화의 모든 측면에서 높은 기준의 적용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발음만 좋은’ 혹은 ‘발음은 좋은데’라며 타인의 외국어능력을 평가하는 장면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r/의 원활한(?) 발음을 위해 혀 밑둥을 절개하는 야만적 수술 행태는 사라진 듯하지만 여전히 ‘원어민 발음(native pronunciation)’의 신화는 맹위를 떨치고 있다. 언어학습에서 좋은 발음을 위한 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스스로 불가능한 기준을 만들고 괴로워하거나, 불가능한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고 깔보거나, ‘좋은 발음’ 이면의 부담을 간과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내 영어에 배어든 한국어 억양은 자랑스럽지도 부끄럽지도 않다. 그저 나라는 존재의 일부일 뿐이다. 태어나고 자란 삶의 터전, 나를 키워낸 이들과 소통하며 미세하게 조정된 안면 근육과 구강 구조, 한국어에 최적화된 뇌구조와 기능 등을 한 번에 날려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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