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과 극은 통한다’

Posted by on Apr 4, 2017 in 강의노트,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다.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되는데 정치의 영역에서는 (극)좌파 인사가 우파, 그 중에서도 극우 정치인으로 변신했을 때 종종 등장한다. 이 말의 매력은 (1) 직관적이며 (‘극’이랑 ‘극’ – 결국 같은 ‘극’이잖아?) (2) 명확한 예시를 찾을 수 있다는 데 있다 (예전에 골수 운동권 OOO, 지금은 XX당 최고위원이잖아?).

하지만 과연 ‘극과 극은 통한다’는 명제가 통계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답은 모르겠다. 포괄적 정치인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이들의 정치성향 좌표를 시대별로 추적한 자료를 본 적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나의 직관으로 ‘극과 극이 통한다’는 말은 과학적 데이터라기 보다는 인상/인물비평에 가깝다. 많은 정치인들의 성향은 조금씩 바뀌지만 극에서 극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다.

그런 면에서 ‘극과 극이 통한다’는 말은 확증편향의 산물일 가능성이 높다. 저 진술에 맞는 데이터가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달까. 강력한 힘을 지닌 예시 몇 개가 모집단에 대한 판단을 결정하는 상황 말이다.

지난 미 대선에서 버니 샌더스와 도널드 트럼프의 유사성을 비교하며 두 후보를 같은 급으로 매도했던 기사들이 떠오른다. 이 둘은 같은가?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고, 이 판단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럼에도 ‘극과 극이 통한다’는 말이 효력을 갖는 이유는 극좌와 극우가 원활한 소통을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열망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인물이 우리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경우 ‘극과 극이 통한다’는 사상적 좌표가 아니라 권력에 대한 광적인 집착과 관련된다. 즉, 상이한 정치세력 사이의 관계가 아닌 개개인의 품성에 대한 진술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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