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전

요즘 Merriam-Webster 사전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는 Kory Stamper의 책 <Word by Word: The Secret Life of Dictionaries>을 재미있게 읽고 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가 마이너스가 되는 직종이래나 뭐라나. Oxford 영어사전 이야기를 다룬 <교수와 광인>, <The meaning of everything>이나 Roget 유의어 사전의 탄생 이야기를 들려주는 <The Man Who Made Lists> 같은 책을 가지고 사전학 수업을 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 덤으로 영화 <행복한 사전>도 함께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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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짝과 함께 <행복한 사전>을 보았다. 여러 분들께 이 영화를 추천받았는데, 가장 먼저 보자고 한 건 짝이었다. 그냥 저 동네에서 일어나는 꽤나 감동적인 픽션이 아닌 지금 이 순간 우리의 현실로 다가온 건 직업 때문이었을까? (짝은 책을 만들고 나는 언어학을 공부한다.)

‘사전’하면 단어와 뜻풀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종이사전을 열면 단어들이 주욱 나열되어 있고, 단어마다 n개의 의미가 정리되어 나온다. 하지만 이 모습은 빙산의 일각이요 유구한 세월 끝에 달린 찰나다. 영화가 잘 보여주듯 사전을 만드는 것은 복잡다단한 일이다. 컴퓨터가 아니라 손으로 단어와 의미를 일일히 기록해야 한다면 그 수고는 말로 다 할 수 없다. 책으로서의 사전은 시쳇말로 ‘역대급 노가다’가 만들어 낸 거대 구조물의 표면일 뿐이다.

하지만 사전작업은 철학이 반드시 필요한 노가다다. 사전의 방향을 정하고 표제어를 고르는 일이 시대의 윤곽을 그려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너무 거창한가? (직업적으로 선입견에 찌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생각해 보자. 새로운 사전 편찬의 첫걸음은 원칙에 따라 더할 단어들과 뺄 단어, 그리고 남겨둘 단어들을 고르는 일이다. 먼저 떠나야 할 단어와 남겨둘 단어, 그리고 새로 맞이해야 할 단어들로 새로운 사전이 채워지면서 지난 사전들의 시대와 새로운 사전이 열어젖힐 시대 사이의 세계가 윤곽을 드러낸다. 이런 의미에서 표제어의 선정 자체만으로도 역사와 시대를 구획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표제어 선정이 중요하긴 하지만 이후 더 큰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고 분류하는 일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특정 단어를 하나의 표제어로 처리할 것인지, 두 개의 표제어로 처리할 것인지부터 엄청난 골칫거리다. 유의어와 반의어를 정의하고, 용례를 설명하는 데까지 이르면 해야 할 일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진다.

이뿐이 아니다. 많은 인력이 동원되는 장기간의 작업에서 특정 단어의 의미 분류에 적용한 원칙을 모든 단어에 일관성 있게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각각의 단어에 알맞는 예문을 확보하고 분류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사전 작업은 그야말로 산너머 산이다.

사전을 만드는 사전 편찬자는 바보가 될 운명이다. 사전이 출판되는 순간 많은 단어들의 의미와 용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A라고 정의했던 단어는 B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고, C라는 단어는 유행에서 사라지고 없다. D라는 단어은 그 뉘앙스가 180도 바뀌어 있고, E라는 단어에는 정치색이 너무 많이 들어가 버렸다. F를 사용하면 꼰대스럽고, G를 사용하면 왠지 잘난체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단어를 모으고 정의와 예시를 써내려갈 때는 안그랬는데 말이다. ㅠㅠ

그렇다.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사전을 만든다고 해도 표제어 중 상당수가 화석화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세월을 막을 수 없기에 단어들은 태어나고 성장하고 죽어간다. 사전은 이렇게 삶과 죽음, 성장과 퇴화, 변심과 배반의 모습이 모두 들어있는 세계의 축소판이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사전을 만드는 것은 인생과 같다”라는 생각을 했다. 나의 사전을 만드는 것이 나의 인생을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 그런데 <나>라는 사전을 채울 단어와 의미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내가 아닌 세계와 타인에게서 온다. 세상과 사람들에서 배운 것들로 <나>라는 사전을 채워가고, 의미를 써내려간다. 사전의 뼈대를 이루는 것은 소통이다.

하지만 늘 베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내 멋대로 단어를 만들 수는 없지만 <나>라는 사전에 등재할 표제어를 고를 권한은 나에게 있다. 그 표제어에 가장 알맞는 예문을 선택할 수도 있다. 운이 좋으면 직접 예문을 써내려 갈수도 있다!

사전이 언제나 미완성이듯 나도 언제나 뒤죽박죽이다. 지금 내 안에는 새로운 생각과 죽어가는 생각, 오랜 시간 나의 일부로 살아온 생각이 혼재되어 있다. 지지리 못났지만 내가 살아온 세계를 오롯이 담고 있는 사전이 바로 <나>다.

우리 각자가 사전이라면, 당신의 ‘행복’과 나의 ‘행복’은 조금 다를 것이다. 당신의 마음에 들어있는 단어 중에서 내 마음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도 있으리라. 당신이라는 사전에서는 ‘돈’이 스무 가지 뜻으로 풀이되는 밝은 단어이지만, 나라는 사전에서는 두어 가지 뜻을 지닌 어두운 단어일지도 모른다. 당신이라는 사전에 등재된 수많은 단어들이 내 사전에서는 단 하나의 추상어로 나와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존재할 것이다.

이렇게 우린 참 많이 다른 사전이지만 몇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나라는 사전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당신들이라는 사전이 필요하다는 것. 살아가는 것은 그렇게 서로를 정의하고 서로에 의해 정의당하는 일이며, 그 와중에 이해와 오해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기 마련이라는 것. 그래서 때로는 잘 정의된 단어로 나 자신을 빼곡히 채우는 것보다 빈 페이지들을 넉넉히 남겨두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

2014.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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