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적 인프라스트럭처로서의 문해력과 교사 공동체

Posted by on Jun 29, 2017 in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생각의 흐름을 제멋대로 따라간 글로 전개가 매우 울퉁불퉁합니다.)

1. 깊은 이해를 좇는 사람들에게 대부분의 설명은 부족하고, 앎의 환상을 좇는 사람들에게 대개의 설명은 과하다.

그렇다면 ‘깊이있는 대중서’는 언제나 모순형용인가? 꼭 그런 건 아니다. 독자의 교양수준이 높다면 다양다종한 개념을 세세히 논의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면에서 사회 구성원들의 문해력은 지식의 효율적인 생산과 분배, 혁신을 가능케 하는 인프라스트럭쳐다.

여기에 딜레마에 봉착한다. 어떻게, 누가, ‘인프라스트럭처’를 깔 것인가? (나도 공범들 중 하나지만) ‘문해력 타령’으로 해결될 수 있는 건 없다.

2. 이와 관련하여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교육개혁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 입시제도 개혁에 대한 논쟁 속에서 수업 자체에 대한 논의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다른 과목은 모르겠고, 영어를 보자. 영어수업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이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없다면 결국 영어수업 특히 고교 영어수업은 ‘입시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뀔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말이다.

3. 얼마 전 고등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매우 소박한 개혁안을 내놓았다. 대략 이런 제안이었다.

“애들하고 영어로 된 짧은 책 한권 읽으면서 토론하고 관련된 거 공부하고 하는 게 지금 교과서 배우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지금은 지문 읽고 문제 풀고의 연속인데 그게 진짜 영어를 공부하는 건 아니지 않나.”

4. 다시 처음 문제로 돌아가 보자.

문해력은 어떻게 키울 것인가? 이에 대한 손쉬운 답은 없다. 하지만 교육개혁에 대한 논의 속에서 문해력을 모든 과목의 중심에 놓는 것으로 상당한 진전을 이룰 수 있다.

쉽게 말해 모든 과목을 해당 지식과 개념에 대한 읽기, 쓰기, 토론하기 등으로 개편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친구에게 이야기했더니 돌아오는 답이 있었다.

“근데 문제는 선생님들도 대부분 글쓰기를 해본 적이 없다는 거…”

고개가 끄덕여졌다.

5. 며칠간 이 문제가 나를 괴롭혔다. 끝없이 돌고 돌아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답 없는 문제의 전형. 그러다가 아침에 커피를 내리는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떠올랐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이분법 속에서 우리 교육은 해법을 찾지 못할 것이다.

“선생 대 학생”이 아니라 “조금 앞서 배우는 자와 새로이 배우는 자”를 상정해야만 객관적 평가라는 신화를 깨뜨릴 수 있다.

선생-학생의 관계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가 아니라 무지에 좀더 민감한 자와 무지에 둔감한 자들로 이해해야 한다.

결국 교사와 학생이라는 전통적인 권력관계를 무너뜨리는 데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5. 이런 맥락에서 교사1인당 학생수와 주당 수업시수, 과도한 행정업무를 줄이고, 그만큼의 시간과 자원을 교사들이 함께 공부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과정을 통해 교사는 가르치는 기계가 아니라 협력하는 지식인으로 성장하고, 그 열매는 자연스럽게 수업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교사들이 역동적인 학습조직을 꾸려 나갈 때 교사의 전문성이 확보될 수 있다.

결국 문해력이라는 사회문화적 인프라스트럭처 건설과 교사들의 삶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학교교육의 한계는 분명하지만 어린 시민들이 십수 년 시간을 보내는 교실을 무시하고 문해력을 신장시킬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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