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어공부 이야기 (2) – 고등학교 (전편)

I.
외고에 진학하면서 나의 영어공부 ‘성공기’는 자기기만이었음을 깨달았다. (성문시리즈의 진도와 독파 횟수로 대표되는) 친구들의 ‘실력’을 보며 중학교때의 노력이 하찮아 보였다고나 할까.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쫄 일도 아니었지만 당시 어린 마음에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았던 듯하다.

일단 보는 책부터가 달랐다. 나는 기본영어를 후반부를 처음 공부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몇몇 친구들은 이미 기본영어를 3-4번 마치고 종합영어를 보고 있었다.

‘종합’이라는 제목이 주는 압도적 포쓰. 기본영어 두께를 비웃는 볼륨감. 귀퉁이 빼곡한 깨알 글씨. 너덜너덜해진 책 귀퉁이.

우쒸. 이 인간들은 언제부터 이렇게 공부를 한 거야!!

당시 해외 거주 경험을 지닌 친구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두세 반에 한 명 정도 어린 시절을 외국에서 보낸 친구들이 있었다. 걔네들 영어 발음은 천상의 것이었다. 지상에 존재하지 않았어야만 하는 발음이었다고나 할까.

사실 나는 그런 발음에 익숙치 않았고 반감마저 가지고 있었다. 한국 애들이면 한국 애들답게 발음을 해야지. (말투 전환) 지가 뭔 미국인이냐? 미국인이야? 지금 와서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지만 당시엔 그리 느꼈다.

일 주일에 두 번 영어회화 시간이 있었다. 이게 나의 영어실력에 미친 영향은 어땠을까?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고등학교 때 회화를 했어? 엄청 좋았겠네.” 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와 정반대였다.

영어회화 한 시간 수업(고등학교이므로 45분 수업이었던 것으로 기억)에 내가 발화는 인사말과 Yes/No 정도. 어쩌다가 말을 할라 치면 턱턱 막혀 스스로에게 실망. 이 과정의 반복.

결국 몇 번 시도하다가 침묵의 단계로 들어섰다. (겉으로는 ‘회화시간에는 과묵한 아이’로 포지셔닝.) 그래서 고등학교 3년간 회화시간에 이야기한 문장이 몇백 개 안될 것이다. 돌아보면 회화수업비를 따로 내고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게 한스럽다.

II.
고등학교 들어가서 첫 해 받은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애들이 왜 이렇게 다 괴물같은 건가. (나중에 알고 보니 다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혼자 끙끙 싸매고 고민하다가 부모님께 상황을 말씀드렸더니, 모건 프리먼 급의 중저음으로 딱 두 마디를 하셨다.

“전학갈래?”
“자퇴할래?”

그래서 난 이야기했다.

“자퇴하기 전에 그래도 한 번 해볼게요.”

일단 충격 받고 그대로 물러나는 게 싫었다. 어떻게든 그 밀림에서 살아남고 싶었다. 그래서 영어의 고군분투는 다시 시작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리 비장할 필요도 없었는데. 어리다는 건 멋지고도 웃긴 것이다.)

III.
내 또래들이 대부분 그랬겠지만 고등학교 때 영어공부는 한마디로 ‘입시공부’ 였다. 학력고사 시절이어서 발음 문제가 출제되고, 문법 문제의 난이도도 상당했다. 무엇보다 주기적으로 보는 모의고사 점수가 진로의 모든 것을 말해주던 때였다.

살아남기 위해서 영어에 매달렸다. 1-2학년 때 꽤나 많은 시간을 영어에 투자한 게 모의고사에는 유효했다. 졸업할 때까지 영어과목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계속되었다. 외고에 다니면서도 말한마디 못하는 신세라니.

IV.
그나마 고등학교 영어 공부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것은 풍부한 어휘 습득이다. 고등학생 치고는 상당히 많은 어휘를 외웠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어휘를 외우는 데 가장 기여한 요인은 ‘사전’이었다.

한 마디로 ‘사전을 끼고 살았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되지 않았었고, 전자사전도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나는 혼비 영영한사전과 함께 3년 내내 동고동락했다.

특별한 비법은 없었다. 다만 주요 어휘라고 불리는 (주로 뜻이 엄청 많은) 놈들은 5번 이하의 뜻까지 외우려고 노력했다. 어떤 것은 15번 이상의 뜻까지 정리하고 예문을 적기도 했다. 주로 동사군들을 중심으로. 그렇게 정리한 두꺼운 단어장이 십수 권이었다. (이후 이 단어장들은 비극적 사건으로 사라지게 되고… ㅠㅠ)

말하기 꽝, 듣기 꽝의 영어실력이었지만 나름대로의 어휘실력을 길렀던 고등학교 시절. 조금은 아쉽지만 그래도 그 때 쌓아 놓은 어휘 실력으로 대학교 4학년을 보냈으니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던 듯하다.

(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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