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휘의 주관성 – ‘맵다’의 경우

Posted by on Nov 11, 2017 in 강의노트,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연애 시절,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다. 양파와 고추 몇 개가 찬으로 나왔다. 매운 걸 잘 못먹는 나는 짝에게 물었다.

“이거 매울까요? 겉으로 봐선 잘 모르겠네요. 드셔 보시고 괜찮은지 말씀해 주세요.”
“네네. (잠시 후) 아주 살짝 맵네요. 아주 맵진 않고요.”
“아 그 정도면 저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삭 소리와 함께 매운 맛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입안에 불이 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쌀밥과 물로는 해결이 안되어서 결국 식당을 나와 우유까지 사 마셨다.

언어가 주관적 경험의 차이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함을 보여주었던 에피소드. “자유”나 “사랑”과 같은 추상적 어휘 뿐 아니라 “맵다”나 “짜다” 등의 감각 어휘도 개인차가 지대할 수 있다는 걸 제대로 깨달았다. (나중에 보니 짝은 청양고추를 치토스처럼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부르르…) 그러고 보면 색상을 표현하는 어휘보다 맛을 묘사하는 어휘에 있어서 개인간 차이가 더 큰 것 같기도 하다.

암튼, 매운 것 잘 드시는 분들. 청양고추 추가해서 드시는 분들. 여러분들은 세계의 표준이 아닙니다. (먼산)

덧: 참고로 생애 최강의 청양고추맛을 능가했던 건 라일락 이파리를 씹었을 때의 충격과 공포다. 궁금해도 참으시기를. (친구의 꼬임에 넘어가 라일락 이파리를 대차게 씹었다가 실제로 죽는 거 아닌가 싶었던 1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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