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크 환자의 좋은(?) 점

Posted by on Jul 17,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1. 누워 뒹굴거리는 일은 이제 더이상 게으름이 아니다. 엄연히 치료와 회복의 일환이다.

2. 앉아서 책을 읽어도 졸리지 않다. 지속적으로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3. 세상 모든 느린 걸음이 이해된다. 아울러 삶의 속도가 급속히 떨어지면서 순간순간을 만끽(?)하게 된다.

4. 지하철 역 곳곳에 설치된 손잡이의 고마움을 알게 된다. 아울러 손잡이가 없는 계단의 접근성 문제를 뼈저리게 깨닫는다. (주의: 뼈저림 = 메타포 아님)

5. 자세를 어쩔 수 없이 교정하면서 키가 손톱만큼 커진다.

6. ‘침대에서 나가지도 못했어’나 ‘앉지도 서지도 못하겠다’ 혹은 ‘길바닥에 그냥 누울 뻔했어’가 과장이나 엄살이 아님을 알게 된다.

7. 아프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금씩 걷게 된다.

8. 고통에 깨지 않고 내리 잔 날에 깊은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9. 다리와 허리가 유기적으로 이어진 단일한(?) 신체기관임을 알게 된다.

10. ‘짜릿함’과 ‘찌릿함’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원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11. 재채기가 나오려고 하는 순간의 서늘한 공포는 왠만한 공포영화를 훌쩍 능가한다.

12. 지팡이를 짚으며 느릿느릿 걸으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완전 이해된다.

13. 때로 신음은 제어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님을 알게 된다.

14. 진통제는 위대하다. 통증은 진통제보다 조금 더 위대하다. 엘리베이터 또한 위대하다. 통증은 엘리베이터보다 조금 더 위대하다.

15. 좌변기, 이거이거 이렇게 밖에 설계할 수 없나?

디스크 환자의 안좋은 점: 위의 것 빼고 다.

6주 전부터 통증 시작. 3-4주 차에는 증세가 극에 달했다. 이틀 정도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와중에 기말 채점과 성적처리를 몰아서 해야만 했는데 덕분에 증세가 호전되질 못했다. 결국 반년을 준비한, 먼 곳에서 돌아와 처음 계획한 해외 학회 참석을 포기했다. 엄청난 돈을 까먹었고 수년 만의 반가운 만남들을 포기해야 했다. 준비한 원고는 언제 빛을 보게 될지 기약할 수 없다.

하지만 2년 여를 준비해 온 여행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짝에게 양해를 구하고 함께 다녀오기로 했다. 통증은 최대한 무리를 하지 않으면서 진통제를 털어넣는 방식으로 다스리기로 했다.

이런 사람을 데리고 머나먼 곳까지 여행을 다녀온 짝과 친구들에게 너무나도 고마운 마음이다. 짐을 들지 못해 미안해하던 나에게 오히려 맘 편히 몸 잘 간수하라고, 여행 내내 더 아프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 말해주던 사람들. 이 빚을 언제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다음에 만나 맛난 밥이라도 사야겠다.

최악의 상태는 아니지만 여전히 쉽지 않은 날들을 보내고 있다. 매번 방학 때 열던 영어논문쓰기 특강 개최도 불투명해졌다. 돈이 문제가 아닌 건 아니지만 허리는 더 큰 문제. 당분간 최선을 다해 뒹굴거리리라.

아프지 않은 사람은 아픔에 대비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프기 시작한 순간 아프지 않은 시간은 인생에서 사라진다.

여러분들도 모두 허리 조심하시기를! :)

* 사진은 잊을 수 없을 스타방게르의 하늘. 조만간 노을을 정리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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