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사라질 때 새로운 소통이 시작된다

Posted by on Jul 27,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사람들은 같아 보이지만 다른 언어를 쓴다. 나의 ‘자유’와 너의 ‘자유’가 다르고, 그의 ‘편두통’과 너의 ‘편두통’이 다르다. 하지만 미묘한 감정이나 뉘앙스를 전달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별탈없이 소통을 하고 협업하며 살아간다. 모순과 헛점 투성이 언어이지만 사람들을 느슨하게 연결해 주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그럭저럭 해내는 것이다.

그런데 코드로서의 언어가 없으면 관계의 끈은 약해질 수밖에 없는 걸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친하게 지내려 노력한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길냥이들에 대한 애정을 유지할 수 있는 데에는 언어 소통의 부재가 한몫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엔 구체적으로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먼저 언어가 아닌 만남이 소통의 주요한 매개가 된다. 내가 고양이들과 특정한 언어로 소통을 했다면 그들의 마음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그 걸음걸이에, 발짓에, 앉고 일어서는 자세에, 혀놀림에, 움직이는 속도에, 꼬리의 움직임에, 울음소리에, 경계태세에, 몸의 떨림에, 그리고 순식간에 변하는 눈빛에 지금처럼 몸과 마음을 기울이진 않았을 것 같다.

코드를 공유하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이 역설적이게도 코드로 환원될 수 없는 수많은 몸짓들에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게 만든다. 서로 얼마나 알아들었느냐, 즉 언어 교환의 효율성(efficiency)이 아니라 한 공간에 함께 존재함(co-presence)이 더욱 중요하고 또 절실할 수밖에 없다. 언어코드의 힘이 줄어드는 지점에서 현상학적 실존에 더욱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언어 코드의 부재는 길냥이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대화가 아니라 탐구를 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냥이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거나 질문을 할 수 없으니 과학적으로 검증된 지식, 큰 고양이 관련 커뮤니티에서 ‘사실’로 통용되는 상식을 찾아보게 되는데, 이를 통해 고양이의 종적 특징에 대해 좀더 이해함과 동시에, 그런 특성이 일반화될 수 없음 또한 알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소통의 모순이 있다. 소통할 수 있음은 소통의 힘에 대한 과도한 신뢰를 수반한다. 경청은 소통에 필수이지만 경청이 소통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라고 믿는 것은 순진하다. 소통가능성은 소통불가능성을 포함한다.

이렇게 보면 언어의 교환은 소통의 아주 작은 부분인지도 모른다. 때론 말 몇 마디를 주워 담고는 ‘이 사람을 이해했어’라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 사람의 사고, 기호, 성향, 인생사 등에 대한 진지한 공부없이 글 한두 편으로 그의 모든 걸 다 알고 있다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본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교훈들. 누군가를 만났다면 몸도 마음도 함께 있을 것, 이해하고 싶다면 깊은 관심을 갖고 오래 지켜볼 것, 몇 마디 말에 그 사람의 모든 걸 담아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 것.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냐옹냐옹냐냐옹.

덧.
시인들은 언어라는 매개로 언어를 뛰어넘고자 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 하지만 그렇기에 시인들에 의해 언어의 외연은 확장되고 심연은 더욱 깊어진다. 그리하여 나에게 시는 ‘언어 바깥의 언어를 꿈꾸는 언어’에 다름 아니다.

#강의준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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