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설 디자인, 안티-어포던스, 그리고 영어교육

‘ 제품을 사용하다가 감전당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심조심 쓰세요.’

복잡한 디자인 오브젝트라는 관점에서 도시를 보면 얼마나 많은 요소들이 어포던스(affordances)를 무시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어포던스는 ‘행동유도성’이라고 종종 번역되는 용어로 디자인 영역에서는 사용자와 제품 혹은 서비스의 관계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의자에 낮아 타이핑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오브젝트가 모든 이에게 의자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갓난 아기에게 이 오브젝트는 의자가 아니다. 300 Kg의 코끼리에게도 의자가 아니다. 이 오브젝트와 나의 관계는 아기 혹은 코끼리와의 관계와 다르다. 즉 이 오브젝트는 나와 아기, 코끼리에게 서로 다른 affordance로 작용한다.

최근 극도로 심한 허리통증을 느낀 적이 있다. 2-3일은 아예 침대 밖으로 나오기 힘들 정도로 아팠고, 두어 주는 느릿느릿 쉬엄쉬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달리기는 언감생심이었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면 호흡을 고르며 뾰족대는 통증을 이겨내야만 했다. 지하철에 설치된 손잡이의 고마움을 알게 되었고 노인들의 발걸음이 지닌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엘리베이터가 모든 역 주요 지점에 설치되어야 하는 이유 또한 말 그대로 뼈저리게 느꼈다.

장애인들의 이동권 투쟁의 시급성과 중대성을 새삼 깨닫게 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신체의 내부에 존재하는 개개인의 능력이라기 보다는 개인과 환경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즉 주변의 환경이 인간의 행동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관련된 문제였다. “특정 장애가 있는 사람은 이동할 수 없다”기 보다는 “도시의 특성상 특정 장애를 가진 사람을 이동할 수 없게 만든다”가 올바른 표현인 것이다.

이같은 관점은 특정한 사물/환경이 어떤 사람을 돕느냐(serve), 다시 말해 어떤 사람에게 편의를 제공하느냐(afford)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한다. 어포던스의 관점에서 환경과 인간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행로 중간이 움푹 파여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것은 대다수의 보행자에게는 큰 어려움을 야기하지 않는다. 볼 수 있는 비장애인에게 움푹 파인 그 곳은 돌아가면 되는 작은 흠결일 뿐이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이나 휠체어 이용자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자칫하다가는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처음 제기한 ‘디자인 오브젝트로서의 도시’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자. 100명 중 99명이 아무 문제 없다고 느끼는 그 결점이 1명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도시를 이렇게 방치하는 일은 어떤 디자이너가 가전제품을 출시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제품은 99명이 사용하기에 매우 적합합니다. 하지만 1명 정도에게는 감전의 위험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알지만 쓰시는 분들이 알아서 조심하여야 할 부분입니다.”

이런 제품을 출시하는 디자이너는 합리적인가?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에게 장애인들의 투쟁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정당한 것이 된다.

나는 이 관점에서 우리의 교실을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교 영어교육의 가장 큰 문제로 삼는 것이 바로 ‘수준차’다. 수준이 다르므로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현재의 평가 시스템에서 이런 고충은 당연하다고 본다. 그렇다고 이 시스템 자체가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이 교육과정에서 25퍼센트는 만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75퍼센트는 수준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예요.”라고 말하는 교육체제가 어찌 합리적일 수 있겠는가?

이런 이해의 기반 위에서 나는 영어교육을 ‘유니버설 디자인’의 관점에서 다시 세워보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갖고 있다. ‘유니버설 디자인’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유니버설 디자인(영어: universal design, 보편 설계, 보편적 설계)은 제품, 시설, 서비스 등을 이용하는 사람이 성별, 나이, 장애, 언어 등으로 인해 제약을 받지 않도록 설계하는 것이다.” (‘유니버설 디자인’, 위키백과)

이 관점에서 영어수업을 보자. 영어교재와 액티비티를 살피자. 영어교육과정을 검토하자.

‘디자인 오브젝트’의 관점에서 현재의 영어교육은 반-유니버설 디자인(anti-universal design)에 가까운 것 아닌가? 온갖 이유 때문에 평등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계급’이나 ‘사회경제적 지위’ 때문에 학교영어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소외되고 패배감에 휩싸이며 심각한 경우 트라우마를 겪게 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의 영어교육은 어떻게 다시 디자인(redesign)되어야 할 것인가?

#영어교육과교육공학
#삶을위한영어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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