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공부, ‘지름길’의 함정

영어교육 관련 일을 하는 터라 사교육 광고를 유심히 봅니다. 많은 광고에서 종종 발견되는 패턴이 있으니 바로 학습기간과 목표를 밝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O주 안에 유창하게”, “O달에 네이티브 되기”와 같은 문구를 보면 공부의 기간 (O주 혹은 O달)과 공부의 목표(유창성 확보, 네이티브처럼 말하기)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자사의 학습 프로그램이 단기간 내에 확실한 성공을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먼저 “유창성”이나 “네이티브 되기”와 같은 표현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몇 주간 열심히 공부를 한다면 현재 수준보다 높은 유창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은 당연합니다. 네이티브 스피커의 능력에 한걸음 더 다가가 있으리라는 것도 예상할 수 있지요. 하지만 여기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습니다. 질소 가득한 과자 봉지처럼 빵빵한 슬로건은 있지만 그 속에 무엇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광고를 하는 사람도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번째는 “네이티브 되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목표라는 것입니다. 한 언어를 네이티브처럼 구사한다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언어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입니다. 학습자들, 특히 사춘기 이후 학습자들에게는 불가능한 목표죠. 성인 학습자라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네이티브 되기’가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할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우리는 한국인으로 영어를 합니다. 한국어 원어민 화자가 왜 영어 원어민 화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하지만 여전히 이런 광고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과장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하면서 구매 버튼을 클릭하게 되는 경우가 많죠. 대개 그 결정을 후회하지만 말입니다.

이런 일이 누군가의 세일즈 전략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가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도 많죠. 그 대표적인 예가 ‘공부를 시켜주는 책’을 사러 갔다가 ‘자료만 잔뜩 들어있는 책’을 구입해서 돌아오는 경우입니다.

학습을 위한 책이 꼭 정보가 많을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책이 안내하는 길을 충실하게 따라갈 수 있느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독려하는 책은 제끼고 참고서(reference) 수준의 화려한 책을 사기 일쑤입니다. 시쳇말로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학습서와 참고서를 혼동한 댓가는 참혹하고도 쓸쓸합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영어실력은 그대로 남고, 책장만 더 화려해지는 결과를 목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보가 빼곡한 책일수록 본격적인 학습에 할당된 쪽수는 적을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부 사교육업체의 과장광고에 끌리는 것과 엉뚱한 책사기는 닮았습니다. 둘다 과정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몇 달 안에 유창해지고 네이티브같은 실력을 갖출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는 순간순간 공부의 기쁨과 고통 속에서만 진정한 실력향상이 가능하다는 점을 애써 외면합니다. 엄청난 지식을 쌓아놓은 책을 집어든 뿌듯함에는 한땀한땀 적고, 꼼꼼히 외우고, 빈틈없이 발음해 보겠다는 결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공부는 한발짝씩 걸어갈 수밖에 없는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언어공부는 뇌 세포의 패턴을 바꾸고, 단어와 소리에 대한 민감성을 재조정하고, 안면 근육과 혀의 움직임을 길들이는 작업입니다. 순간이동이나 변신의 마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내딛는 걸음마다 뿌듯함이 배어나오는 때가, 어제보다 나은 나의 모습에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 분명 있기 때문입니다. 네이티브가 아니어도 좋고, 엄청나게 유창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당장 대단한 일에 써먹을 수 없다 하더라도 공부를 통해 성장하는 자신을 목격할 특권은 누구에게나 허락되어 있습니다. 산책의 목표가 걸음에 있듯 공부의 목표는 하루하루의 정성과 보람에 있습니다. 네이티브라는 신기루 같은 봉우리가 아니라 내가 만들어 가는 작은 언덕이면 족합니다. 그것이 삶을 위한 영어공부가 우리에게 주는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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