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법, 그리고 가르치면서 사는 일에 대하여

Posted by on Oct 9, 2018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일상 | No Comments

1. 이론으로서의 교수법이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방식은 권위적입니다. 유명 학자들이 쓴 교수법 책에는 (저자들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이게 가장 좋은 길이니 현장에 적용해야 해”라고 말하는 듯한 아우라가 있습니다. 이런 책으로 임용고사를 준비하는 수업에서 주체의 삶과 유기적으로 통합되지 않는 과학적 지식은 힘을 잃게 되고 때로는 위험할 수도 있다는 점을 상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2. 하지만 많은 교사들의 경험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명확합니다. “최선의 교수법은 이론-내부에 있지 않고 이론과 주체가 만나는 상호작용의 공간 interactive space 에 있다”는 것입니다. A+B에서 A나 B가 아니라 플러스(+) 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죠. 이 플러스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사와 학생, 즉 교육 주체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3. 현재 대부분의 교수법이 교육주체의 자아를 포괄하지 못한다는 것, 다시 말해 교수학습이론은 교사와 학생의 내면에 대해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교실은 주어진 교수학습방법론을 충실하게 적용해야 할 장소가 아니라, 반쪽짜리 교수학습이론이 재구성되어야 할 비판적 실천의 장이 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주어진 교수학습방법론을 ‘주체가 개입하여 재정의해야 할’ 장(field)으로 변화시키는 비판적 실천이야말로 교육이론을 밀고 나가는 궁극적 동력이 됩니다.

4. 이런 관점에서 회사는 경영-조직이론이 재구성되고 재창조되는 비판적 노동의 공간이, 종교기관은 전통적 교리가 재구성되고 재창조되는 비판적 신앙공동체가 됩니다. 이것이 가능할 때 우리는 일하는 기계나 맹목적 추종자가 아니라 전통과 현재, 나아가 새로운 여정을 탐구하는 역사적 인간이 됩니다.

5. 어떤 조직이든 주체의 역사-삶-지향, 즉 과거-현재-미래를 모두 고려하지 못할 때 교조적이며 권위적인 공간으로 추락합니다. “하던대로 하라”는 명령에는 시간도, 실패도, 혁신도 존재하지 않지요. 시간이 사라진 공간은 성장하는 유기체가 아니라 회색 콘크리트일 뿐입니다. 겉치레가 아닌 실질적 혁신을 원한다면 비판과 소통, 실험과 실패를 권장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6. “교직은 매일 마음의 상처를 주는 직업이기 때문에 우리는 용기를 잃는다. 반드시 교실에서 알몸으로 서 있는 기분을 느껴야만 용기를 잃는 것은 아니다. 칠판에 문장분석을 하거나 수학증명을 풀고 있을 때, 학생들이 졸거나 쪽지를 돌리기만 해도 교사는 낙담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과목이 아무리 아무리 기술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내가 가르치는 것은 결국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중한 것이 나의 자아의식을 형성한다.” – 파커 J. 파머. <가르칠 수 있는 용기> (한문화) 38쪽

교사는 매일 용기를 잃게 된다는 파머의 말이 마음을 파고듭니다. 하지만 상처를 받는 그 공간에서 상처를 넘어서는 용기를 얻게 되는 것 또한 사실 아니던가요. 어떤 일, 어떤 사람도 내가 원하는 반응만을 주진 않습니다. 기실 상호작용의 대상으로부터의 상처는 상호작용의 정의에 포함된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상호작용하는 “대상”이라고 썼지만, 그 대상은 나와 동일한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주체와 주체의 만남은, 주체가 대상을 제어하는 ‘이용’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기에 어긋나고 부딪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상처에 점점 취약해지는 저를 봅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부터도 꽤나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고요.)

7. 오래 전부터 붙잡고 있는 화두가 있습니다.
아마도 평생 가져갈 화두인 것 같습니다.

“배운대로 가르친다.”

이렇게 말하든 안하든,
저를 포함해서 많은 분들이
예전에 배운대로 가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배운 대로 가르치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모든 선생님들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도 아니구요.

다만 이런 경향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지식을 전달하는 방법은
지식 자체의 성격과 맞물려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지식이라 하더라도
전달하는 방식에 따라
학생들에게 다른 *의미*가 되죠.

지식의 습득은
지식에 대한 태도와 의미가 구성되는 방식과
동전의 앞뒤면처럼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나 할까요.

이미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이 계시고,
교사 개개인의 자질이 나아지고 있다는 평가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교실에 대해 불신을 갖는 이유가 뭘까요?

이에 대해 한 가지 답을 내릴 수는 없을 겁니다.
한국의 입시문화, 학력주의, 신자유주의적 경쟁체제 등등,
교육을 쥐고 흔드는 괴물이 너무 많죠.

사회경제적, 문화적 자본의 불평등은
말할 수 없이 심화되어 가구요.

이런 비관적 상황 속에서
“그래도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나?”라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가르치는 사람들의 성찰과 소통,
비판적 실천, 그리고
더 나은 교육과 세상에 대한 의지가
희망의 단초가 되지 않을까요?

교사가
배운대로 가르치는 존재에서
배웠던 것, 방법을 의심하는 존재로,
최신 이론을 가져다 쓰는 존재에서
그것을 자신이 처한 교육의 맥락에서
재구성하고 발전시키는 존재로 성장한다면
멋진 일들이 조금씩 일어나지 않을까요?”

물론 여전히 상황은 비관적입니다.
교사가 교육 전체를 바꾸려고 하는 건
계란에 바위치기 같은 것이죠.

하지만 몇 년 안되는 교직 경력 속에서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선택한 순간
갑갑한 교육현실을 냉소하거나
학생들에 대해 절망할 자격은
영구히 박탈된다는 것.

절망적인 통계 결과 앞에서도
절망할 권리는 없다는 것.

가르치는 일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일이며
구체적 실천으로
희망을 만들어 가는 일이기 때문에…

“넌 할 수 있어” 처럼
값싼 희망의 말 몇 마디가 아니라
모두 같이 삶을 같이 일구어 갈 수 있다는 믿음.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지금의 절망을 좀더 더 절망적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는 그런 믿음 말입니다.

교육을 통해 인류가 가진
가장 값진 것들을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때
모두가 더 행복해 질 수 있다는 확신.

어떤 교과를 통해서건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희망.

가르치는 일은
이런 가치들을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할 운명에
스스로를 묶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8.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배운대로 가르친다면
왜 교사교육이 필요한가?”

저에겐 아직 답이 없습니다.
아마 평생 지고 가야 할 문제일 겁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나는 두 가지 구절이 있습니다.
파커 파머의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르칩니다.”라는 말.

그리고 헨리 지루의 책 제목이기도 한
“교사는 지성인이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교과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입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스펙을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학생 자신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학생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 자신의 일부가 될 지식을 만들어 나갑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지성인으로서 연구하고 토론하고 실험하며
우리 자신의 교육을 만들어 갑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가르칠 때
학생은 학생 자신으로 교실에 들어옵니다.
우리가 지성인으로 스스로를 정립할 때
학생들도 스스로를 지성인으로 키워갑니다.

9. 가르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또
역설적이지만 영광스럽게도,

“교육은 계급을 재생산하는가?”라고 묻지 말고,
“교육은 계급을 재생산해서는 안된다”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배운대로 가르치는 존재에서
평생 배우는 존재로 살아가는 일.

거창하게 들리지만
즐거운 여정 아닐까요?

매일 비틀거리지만
이런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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