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교사들을 위한 인지언어학 이야기 45: 체화된 시뮬레이션 가설 (1)

Posted by on Oct 25, 2018 in 강의노트, 인지언어학, 집필 | No Comments

“기온이 39도까지 올라가는 최악의 폭염, 40명이 넘게 모인 좁은 교실의 에어콘이 고장났다. 사람들은 나누어준 팜플렛을 말아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문장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일까요? 다른 말로 하면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이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듯한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문장의 의미는 단어에서 오고, 단어의 의미는 그 정의이다    

영어공부를 하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찾습니다. 그리고 뜻을 확인하죠. 우리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신문을 읽다가 “전가의 보도”를 만났는데 그 뜻을 모른다면 국어사전을 찾기 마련이죠. 사전에서 뜻을 확인한 후 텍스트를 계속 읽어나갑니다. 이 시나리오에서 단어의 의미는 사전의 정의(definition)입니다. 단어를 안다는 것은 사전의 정의를 안다는 것이며, 이는 의미에 대한 전통적인 이론의 근간을 이룹니다. 말의 뜻은 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도록 하죠. 단어의 뜻이 사전에 나와 있는 정의라고 한다면 그 정의는 무엇으로 이루어질까요? 국어사전이라면 쉽게 모국어라고 답할 것입니다. 뜻풀이 또한 우리 말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단어의 뜻을 알려고 하는 경우라면 어떨까요? 영단어를 한국어로 번역해서 이해하기도 하고 영영사전의 정의를 통해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렸을 때 스페인어 사용국에서 오래 산 경험이 있다면 영어-스페인어 사전을 가지고 의미를 파악하는 것도 가능하겠지요.

여기에서 하나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언어의 의미가 언어로 된 정의라면, 정의를 이루고 있는 언어는 어떻게 이해하는 것일까요? 영어학습 초기에 영영사전을 사용해 보셨다면 단어를 찾다가 ‘뺑뺑이를 돌아 본’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단어의 뜻을 정의하는 부분에 모르는 단어가 나와서 그 단어를 다시 찾아보니 또다시 모르는 단어가 나오는 경우입니다. 이때는 그냥 영한사전을 참고해서 해결하곤 했지요. 그렇다고 해도 질문은 남습니다. 언어의 의미가 언어 내에 있다면 세상만사와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언어는 언어 밖으로 어떻게 나가서 세계와 만나는 것일까요?

언어를 이해하게 만드는 시스템은 우리 뇌에 존재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이해하는 또다른 시스템을 생각해 내야 합니다. 언어를 언어로 이해해서 그 의미를 모두 아는 것이라면 언어와 세계가 만날 길은 영영 사라지니 말입니다. 이 점을 깊게 고민한 학자는 미국의 철학자 Jerry Fodor였습니다. 그는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주고받는 자연어 이외에 우리 뇌 속에서 이 언어의 의미를 알게 해주는 상징 시스템이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진정한 말뜻은 다른 말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언어로 변환했을 때 알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주장을 사고언어가설(LOTH; the Language of Thought Hypothesis)라고 부릅니다.

사고언어는 우리가 발음할 수 있는 언어와는 다르게 소리값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를 코드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죠. 마치 단어를 이리 저리 옮겨 문법구조를 바꿀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고언어는 정신어(Mentalese)라고도 불리는데, 우리가 어떤 자연어를 사용하든지 공통으로 갖고 있는 시스템입니다. 다시 말해 한국어를 쓰건 영어를 쓰건 스페인어를 쓰건 관계없이 이들 언어의 의미를 부호화(encoding)할 수 있는 인간 공통의 표상체계인 것입니다. 이같은 가정에 근거하여 Fodor를 비롯한 사고언어가설의 지지자들은 인간이 한국어와 같은 자연어보다 더 추상적인 수준의 기호 시스템인 정신어로 사고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뇌는 이러한 정신어를 표상할 수 있는 생물학적 체계를 갖추고 있고, 이는 모든 이들이 갖고 태어납니다.

전통적 의미가설과 사고언어가설의 한계

하지만 사고언어 가설도 언어의 의미에 대한 전통적 가설이 갖고 있는 약점을 완전히 넘어서지는 못합니다. 언어의 의미를 언어에 가두어 버린 전통적인 관점도, 일상어를 사고의 언어로 ‘번역’해서 이해한다고 믿는 사고언어가설도 의미의 발생을 언어적이고 인지적인 측면에 가두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두 가설은 우리가 언어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과정을 순수히 상징적인 차원(symbolic dimensions)에 국한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언어를 통해 사고하고 생각을 교환하는 일은 보는 일이나 듣는 일, 우리의 근육을 움직여 운동하는 일과 관계 없이 독립적으로 일어나는 일일까요? “기온이 39도까지 올라가는 최악의 폭염, 40명이 넘게 모인 좁은 교실의 에어콘이 고장났다. 사람들은 나누어준 팜플렛을 말아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는 문장을 이해하는 데 오로지 언어적이고 논리적인 표상(representation)만이 개입하는 것일까요?

오랜 시간 언어학은 이 질문에 대해 확실한 답을 내놓을 수 없었습니다. 언어와 사고, 시각, 청각 등의 지각체계, 나아가 운동체계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살펴볼 수 있는 방법론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간학문적 접근을 통해 60년대 이후 꾸준히 발전해 온 인지과학, 이와 함께 발전하고 있는 심리언어학적 연구방법론, 2000년대 들어서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뇌영상 기술 등이 언어의 작동방식, 언어가 의미를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을 밝혀낼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천 년 미스테리 속에 숨겨져 있었던 의미생성의 메커니즘을 밝혀내는 데 속도가 붙기 시작한 것입니다.

“체화된 시뮬레이션 가설(embodied simulation hypothesis)”은 이같은 흐름에서 부상하고 있는 언어의 의미작용에 대한 가설 중 하나입니다. 이에 따르면 가설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언어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다른 언어로 뜻풀이를 해서도 아니고 사고의 언어로 변환을 해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언어의 의미를 이해하고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언어에 의해 촉발(trigger)되는 다양한 감각 시뮬레이션을 실행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단순화시켜 말하면 우리는 뇌와 신체가 기억하고 있는 바를 자원으로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수행함으로써 특정 언어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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