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공부의 원칙: 영어 자막 넣고 볼까 빼고 볼까

외국어 학습에서 외국어 인풋의 중요성은 누누이 강조되지만, 한국어 배경지식이 갖는 중요성은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 듯합니다. 이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가 읽거나 들을 때 외국어 홀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지식의 기반 위에서 돌아갑니다. 따라서 외국어로 된 자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외국어 지식과 함께 세계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갖추어야만 합니다. 어떤 언어를 공부하든 다양한 지식의 습득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인이라면 지식 대부분이 한국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평생 한국어로 경험을 쌓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외국어 학습에서 한국어를 방치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한국어로 된 지식 키워가며 이를 외국어능력과 통합하려는 자세와 전략이 필요합니다. ‘나는 양자역학 강의를 영어로 들어야 하니까 모든 개념을 처음부터 영어로만 공부하겠어’라든가 ‘인공지능 관련 보고서를 써야 하니 인공지능 기초부터 영어로 파볼까’라며 고집을 피우는 것은 그야말로 똥고집일 뿐입니다.

한국인의 경험은 한국어로 표현되고 공유되며 체계화됩니다. 우리말은 우리의 경험 곳곳에 스며있지요. 영어공부의 과정에서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한국어 자막의 효용일 것입니다. 그냥은 잘 들리지 않던 영어 뉴스 혹은 영어 드라마도 한국어 자막과 함께 보면 좀더 잘 들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말로 익힌 내용을 영어로 들으면 단어를 조금 놓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모국어와 외국어의 상호작용이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영어 인풋을 이해하는 데 있어 모국어로 된 배경지식이 도움이 된다는 점 또한 시사합니다.

신경언어학의 연구는 사춘기 이후 외국어를 처음 배웠을 경우 모국어와 외국어가 사뭇 다른 뇌 회로와 활성화 패턴을 통해 처리됨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국어 지식과 자막이 외국어 이해에 실시간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다수의 경험은 모국어와 외국어가 엄청난 속도로 상호작용할 수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언어 능숙도와 자막의 효용

다만 엄밀한 연구를 위해서는 학습자들이 자막을 켜고 영상을 볼 때 ‘들린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어디까지가 실질적 이해이고 어디까지가 ‘이해했다는 착각’ 혹은 사후적 합리화인지 밝혀내야 하는 과제가 남습니다. 예를 들어 저와 같이 영어가 어느 정도 능숙한 학습자가 영미권 드라마를 볼 때엔 다음을 가정할 수 있겠습니다.

(1) 영어 구어체에서 사용되는 어휘적, 문법적 패턴에 익숙하다. 즉 해당 언어의 일상어 전반에 대한 지식이 있다.

(2) 드라마 전개상 해당 대화가 어디로 흘러갈지 대략적인 파악한 상태다. 기존 스토리라인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 추측(inference)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3) 드라마의 소재가 특이하지 않다면 해당 대화에서 나올 수 있는 대략적인 어휘 집합(lexical sets)에 대해 배경지식이 있다. 이는 드라마의 내용과 연관된 어휘지식에 해당한다.

(4) 드라마 시즌의 후반부를 보고 있다면 이전 에피소드들을 통해 주요 인물의 발음과 대화 패턴을 암묵적으로 익힌 상태다. 이는 각각의 인물의 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런 상황에서 자막을 켜고 볼 때 저의 뇌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언어 능숙도에 따라 뇌의 여러 부위는, 특히 모국어와 외국어를 담당하는 부위는 어떤 활성화 패턴을 보이게 될까요? 전문적인 내용이 등장하는 에피소드에서 영어 자막의 효용은 어디까지일까요? 이런 주제로 깊이 있는 연구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들 연구 결과를 근거로 ‘자막 절대 금지’나 ‘무조건 자막 끄고 5번 이상 보세요’보다는 훨씬 더 과학적인 제안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영어로 말하기 쓰기 또한 영어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2018년 호주오픈 테니스대회에서 선전한 정현 선수의 인터뷰가 있습니다. 한 신문은 “영국 신문 ‘가디언’은 8강전 직후 “로저 페더러와 토마시 베르디흐 중 4강전 상대로 누굴 원하냐”는 질문에 “반반”이라고 한 정현의 위트를 놓고 “외교관급 화술”이라고 칭찬했다.”라고 보도합니다. (중앙일보 2018년 1월 28일자 기사)

정현 선수의 절묘한 유머가 담긴 인터뷰는 분명 영어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이 인터뷰의 성공이 그저 ‘영어’공부의 소산이라기보다는, 소통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에서 나왔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기사에도 나오지만 특정 문화에 대한 관심, 주도적으로 의견을 표출하는 연습 등이 쌓여 멋진 인터뷰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영어를 표현의 암기가 아닌 문화적인 산물로, 의사표현의 매개로 배운 덕분이었습니다.

흔히들 커뮤니케이션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유머감각을 꼽습니다. 감각은 단기간에 암기하거나 체화할 수 없습니다. 오랜 기간의 경험과 고민, 깊이 있는 학습으로 길러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적절한 유머의 구사는 복잡한 인지적, 정서적 요인에 대한 고려와 순간적인 판단을 요하는 고도의 언어능력입니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자신을 비루하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즐거움과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를 즉석에서 구사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유머감각을 키우는 일은 ‘영어’공부를 넘어 ‘커뮤니케이션 공부’, 나아가 삶에 대한 깊은 고민을 요구합니다. 한국어 원어민 화자라면 이러한 커뮤니케이션과 삶의 기저에 한국어가 자리잡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이쯤에서 이 질문을 하시는 분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막은 어쩌라는 겁니까?’

자막 사용 여부를 정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집중력의 한계, 동기 수준, 가용 학습시간 등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자막만 끄면 잠이 오거나, 조금만 이해가 안되어도 듣기 공부를 지속하기 힘들다는 분들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크게 두 가지 시나리오를 기준으로 자막 활용 여부를 결정할 수 있겠습니다.

시나리오 1: 학습의 목표가 소리에 익숙해지는 데 있다면 자막을 끄고 반복해서 청취하는 것이 좋습니다.

시나리오 2: 하지만 영어를 통해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는 데 중점을 둔다면 자막을 활용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선택입니다.

첫 번째 시나리오가 언어를 이해하는 데 있어 상향식(bottom-up) 정보처리에 중점을 둔 공부라면 후자는 하향식(top-down)에 방점을 찍는 방식입니다. 소리를 하나 하나 쌓아 더 큰 의미로 나아갈 수도 있고, 자료의 소리와 단어, 문장을 이해하는 데 듣기 각종 배경지식과 경험을 동원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 두 가지 메커니즘은 언어 이해에서 동적으로 상호작용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막을 무조건 끄고 보아야 한다는 원칙에 매달리다가 영어학습에 대한 동기가 급속히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자막을 끄다가 동기도 ‘꺼지게’ 되는 불상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보려고 이걸 자막도 없이 보고 있나?’라는 생각이 든 적이 있으시다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영어공부에서 이 두 가지 모드를 적절히 섞어 활용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나아가 듣기를 단지 듣기로만 접근하기 보다는 다른 모드, 특히 읽기와 함께 공부하는 것이 효율적입니다. 무조건 소리와 씨름하기 보다는 관련된 지식을 다룬 텍스트를 공부과정에 적절히 통합하는 것입니다. 최근 드라마나 유튜브 영상의 자막을 구하기 어렵지 않고, 검색엔진에 키워드 몇 개만 넣으면 관련된 글이 쏟아집니다. 자신의 상황에 적합한 자료를 수집해서 영상을 입체적으로 공부하는 습관을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자막을 꺼야 인풋이 많아지고, 인풋이 많아져야 영어를 더 빠르게 배울 수 있다는 조언을 무조건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영상으로 영어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자막 끄고 봐야 돼? 켜고 봐야 돼?’라는 질문으로 골치 아파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들릴 때까지 듣는다’는 고집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인풋’에는 소리도 있지만 그 소리에 대응하는 모국어도 있고, 관련된 기사도 있으며, 드라마의 대본도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무자막 모드’, ‘자막 모드’, 관련기사 읽기 모드, 대사 직접 확인하기 모드 등을 적절히 믹스 앤 매치(mix & match)하면서 자신의 스타일을 찾아갈 때 좀더 효율적인 듣기공부가 가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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