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학습 자서전이 말해주는 것

Posted by on Dec 30, 2018 in 단상, 삶을위한영어공부, 영어, 집필 | No Comments

다섯 해 째 대학생들의 ‘영어학습 자서전’을 읽고 있습니다. 영어학습 자서전이란 평생 자신이 경험한 영어학습의 역사를 1인칭 시점으로 정리한 글을 말합니다. 학생들은 자신의 영어학습 연대기를 꼼꼼히 작성하면서 영어공부를 어떻게 시작했는지, 영어공부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누구였는지, 기억에 남는 교재는 무엇이었는지, 어떤 공부방법을 주로 사용했는지, 영어학습의 위기 혹은 터닝포인트는 무엇이었는지 등에 대해 반추합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영어학습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누적 백 여 명이 빼곡히 적어낸 언어학습 자서전 속에서 한국사회의 영어교육에 관여하고 있는 여러 주체들을 만나게 됩니다. 학부모, 영어유치원 선생님, 공교육 교사, 학습지 교사, 학원 강사, 유학 및 어학연수 업체 관계자, 과외와 재수학원 선생님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한국의 영어교육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영어교육에 대한 평가와 관계 없이 참으로 많은 주체들의 경쟁과 협업에 기반해 영어공부의 생태계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어 보입니다.

‘영어공부에서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현재 나의 영어실력’. 개별 학생들이 걸어온 공부의 궤적은 조금씩 달랐지만 영어학습 자서전을 관통하는 주제는 이 문구로 요약할 수 있었습니다. 평생 영어공부의 결과라는 관점에서 현재 자신의 영어실력을 평가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던 것입니다. 읽기는 꽤 잘 하지만 쓰기는 못한다, 말하기는 다른 영역에 비해 떨어진다, 전반적으로 나의 영어실력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인풋(영어에의 노출) 부족인 것 같다 등의 서술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이와 같은 결과에서 두 가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영어공부의 과정에서 감동과즐거움의 순간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서술은 영어와의 ‘사투’를 그리고 있었고, 중학교 이후의 영어학습은 철저히 입시를 염두에 둔 준비과정으로 기술되어 있었습니다. 당연히 영어를 통해 세계를 만나는 설렘과 기쁨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영어와의 전투에서 승리 혹은 실패한 이야기가 영어학습사의 중심 주제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영어를 잘하는 집단에 속한 학생들조차 자신의 실력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실력을 가졌음에도 영어실력의 부족함을 강조하는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강점보다는 약점을 드러내는 서술이, 이룬 것보다는 앞으로 성취해야 할 목표에 대한 이야기가 두드러졌지요. 자신이 설정한 영어학습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슬픔과 좌절을 묘사한 대목도 적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영어가 갖는 위상과 권력을 생각해 볼 때, 영어학습의 역사를 돌아보는 글이 성공과 실패, 투자대비 성과, 원하는 수준에의 도달 혹은 미달 등으로 점철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흥미와 재미를 염두에 두고 시작하지만 점차 성적과 시험을 위한 영어공부가 되는 현실에서 타인과의 끊임없는 비교는 피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누구나 다 하는’ 영어를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는 쓰라림 또한 떨쳐내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세상은 ‘왜 여태껏 그 실력밖에 안되느냐’고 계속 속삭이고 있지요.

“삶이 영어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영어에 끌려가는 삶.
한국사회의 영어공부는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삶을 위한 영어공부,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통로가 되기 보다는 힘겹게 올라야 할 사다리가 되어버린 영어, 삶을 풍요롭게 하기 보다는 불안하고 팍팍하게 만들고 있는 영어에 대해 고민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경험, 재미, 만남, 감동, 깨달음, 상상으로 가득한 영어공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를 고민했습니다. 영어를 정복하기 위해 처절히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영어와 함께 놀고, 떠들고, 감동받고, 박장대소하고, 농담을 주고받는 법을 궁리했습니다. 짧지 않은 시간 이 질문들에 천착하면서 한국사회의 영어공부를 관통하는 세 가지 주요 현상에 대해 더욱 깊이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경험이 아니라 입력(input)을 우선시하는 영어공부.

학습의 주체가 아니라 네이티브와의 비교 대상이 되어버린 자신

공부의 기쁨을 쌓아 성장하기 보다는 어떻게든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욕심

(계속)

#삶을위한영어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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