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을 나타내는 언어가 없으면 보지 못한다?

Posted by on May 14, 2019 in 과학, 수업자료, 인지언어학 | No Comments

색상을 가리키는 언어가 없다면 그 색상을 볼 수 없다는 취지의 컬럼이 공유되고 있는데… 컬럼의 내용상 기 도이처의 저작인 <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를 그대로 인용하신 것 같습니다. 저도 즐겁게 읽은 책이네요.

특정 대상을 지칭하는 언어가 없으면 인지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전통적인 워프 가설에 대응하는 주장입니다. 흔히 언어결정론(linguistic determinism)이라고 불리지요. 하지만 이런 강한 언어결정론은 학계에서 더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다만 언어의 사용이 인지과정을 세밀하게 조정하거나 특정 대상의 개념화에 다소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논의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이 또한 논쟁의 대상이 되긴 하지만요.

학계의 논의를 떠나서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저는 이름 모를 색깔들을 꽤 많이 구별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 그렇습니다. 여러 종류의 립스틱을 놓고 색깔을 대보라 하면 어버버 하겠지만 서로 다른 색상의 립스틱을 구별하는 일이 아주 어렵진 않겠지요.

컬럼에서는 마치 언어학계의 중론인 것처럼 말씀하셨지만 이름을 모른다고 색상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사실 근거가 희박한 주장입니다. 다만 특정한 이름을 붙여 색상들의 스펙트럼을 특정한 범주로 분류하는 일에 익숙해지면 관련 색상을 잘 구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는 ‘Blue”라고 통칭되는 색상이 러시아어에서는 goluboy와 siniy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 경우 미국인들과 러시아인들에게 goluboy와 siniy 경계의 색상을 보여주고 이를 구별하라고 하면 러시아인들이 미국인들에 비해 구별하는 속도가 미세하게 빠릅니다. 하지만 이것이 미국인들이 저 아래 중간 사각형 두 개의 차이를 보지 못한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지요.

좀 다른 이야기지만 동물들은 색상을 가리키는 말이 없어도 자신이 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다양한 색상을 구별합니다.

덧. 컬럼에서 언급되었듯 기 도이처 또한 색상용어가 등장하는 순서가 일정하다는 것을 말하긴 했지만 이 분야를 개척한 사람은 Brent Berlin과 Paul Kay입니다. 1969년 기념비적 저서인 <Basic Color Terms: Their Universality and Evolution>을 내서 색상과 인지에 관한 논의를 촉발시켰습니다. 이 저서에 대한 설명은 아래 위키 페이지를 참고하십시오.

https://en.wikipedia.org/…/Basic_Color_Terms:_Their_Univers…

덧2. 일반인 수준에서 색상용어에 관한 학계의 논의를 정리한 영상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Vox 미디어에서 제작한 <The surprising pattern behind color names around the world> 입니다.

덧3. 아래 색상 이미지는 Lera Boroditsky의 테드 강연 <How language shapes the way we think>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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