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주체로 호명되는가

 

어제 많은 분들이 공유한 영상입니다.
저 또한 보면서 뭉클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김성환 의원과 같은 정치인이 많아지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개운치만은 않았습니다.
기사에 붙여진 제목과 설명 때문이었습니다.

“경청, 설득의 힘 보여준 김성환 의원”

기사의 주인공은 김성환 의원입니다.
물론 그의 침착한 행동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이런 기사들의 주연은 왜 대부분 정치인일까요?
오랜 시간 해당 이슈에 천착하며 싸워온 분들은 왜
늘 배경에만 머물러 있을까요?

왜 이 기사의 제목은
“시각장애인 어머니들, 정치인의 마음을 녹이다”가 되지 못할까요.

꼭 이 기사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청소년 단체가 줄기차게 무언가를 요구해 왔는데
박원순 시장이 우연히 그 시위대를 만나
청소년의 이야기를 듣고 메모를 한 뒤
후속조치를 약속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다음날 헤드라인은 누가 장식할까요?
청소년 단체의 구성원들과 대표일까요?
아니면 박원순 시장일까요?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을 겁니다.

뭐 헤드라인 하나 가지고 깐깐하게 구느냐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고요.

하지만 해당 기사 뿐 아니라
이 사회의 수많은 기사들이
그런 시각에서 생산된다면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노동자, 농민, 성소수자, 여성, 어린이, 장애인, 이주노동자 등등이
계속해서 싸워나가고 있는 가운데
특정한 조치가 취해졌을 때
왜 꼭 자치단체의 수장이나 정치인이
주체로 호명되어야 하나요.

어쩌면 이런 헤드라인들은
이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주체가
권력의 자리에 오른 이들이라는 고정관념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은 아닐까요?

누구를 주어의 자리에 놓느냐
누구를 화제로 올리느냐
누구를 가장 앞에 배치하고
누구를 저만치 뒤에 남겨두느냐.

세계의 싸움은 현장에도 있지만
문장 하나를 구성하는 방식에도 존재합니다.

더 많은 ‘무명’의 보통 사람들이
주체로 호명되며
헤드라인의 주어로 등장하기를.

더 많은 정치인들이
무명으로 남길 자처하며
‘경청’은 큰 뉴스가 되지 않는 날이 오기를.

그런 순진한 꿈을 꾸는
아침입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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