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터러시 연구의 자기성찰

1. 독서를 할 때 텍스트 자체의 독해와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경험이 동시에 일어난다. 재독을 할 때에는 전자에 할당되는 인지적 자원이 줄면서 경험의 허락되는 자원이 확연히 커진다. 그런면에서 재차 읽는 행위는 전혀 다른 종류의 여정을 약속한다.

2. 그런 면에서 여행이건 영화감상이건 독서건 ‘다시’는 질적으로 다른 반복이다. 많은 경우 첫 읽기는 저자에게로 가는 길이지만 다시 읽기는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이다. ‘다시 읽지 않았다면 읽은 것이 아니’라는 말은 읽기의 이런 속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3. 월터 옹의 <구술문자와 문자문화>는 두 문화의 차이를 언어시스템의 차이가 아닌 정신성(mentality)의 차이로 설명한다. (문예출판사의 번역본은 ‘정신구조’라는 용어 사용) 두 문화의 차이에 대한 논의도 놀랍지만 책의 모두에 강조하는 바는 리터러시 연구자들에게 강력한 ‘메타메시지’를 던진다. 그것은 구술문자와 문자문화에 대한 차이는 언제나 문자문화에 익숙한 이들에 의해 연구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연구자는 ‘둘 다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지만 사실 한쪽의 멘탈리티를 장착하고 둘을 볼 수밖에 없다. 공평무사함은 존재하지 않으며 연구자의 시선만이 있다. 세계는 단숨에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한땀한땀 직조된다. 과학사회학이 과학에 대해 던지는 경고를 월터 옹은 리터러시 연구자들에게 던지고 있는 셈이다.

4.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그의 자전적 회고 <문맹>에서 자신의 고향 헝가라를 떠나 스위스로 이주한 자신이 처했던 언어적 상황을 그린다. 새로운 땅에서 프랑스어에 대해 ‘문맹’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 아름다운 나라가 “‘통합’이나 ‘동화’라고 부르는 것에 다다르기 위해 건너야만 하는 사막에 불과함”을 말한다. (91쪽)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경험과 같이 우리는 누구나 새로운 언어 앞에서 ‘문맹’이 된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경계 안에서 단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단일한 리터러시를 상정한다. 한국어 리터러시는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5.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도 이것이 옳지 않은 견해임을 알 수 있다. 리터러시는 언어라는 기준으로 나누어지기도 하지만 경험과 지식이라는 기준으로 구획되기도 한다. 특정 직업군마다, ‘덕질’의 영역마다 리터러시의 너비와 깊이가 달라진다. 성장배경이나 정치적인 견해차가 뚜렷한 경우에도 리터러시의 색깔이 달라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리터러시의 복수성과 소통(불)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하나의 리터러시가 아니라면 소통은 어떻게 가능한가? 소통의 지평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공론장에서 ‘문해력’ 타령은 타당한 일인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문해력 때문’이라는 말은 폐기 대상이 아닌가? 어떤 세계에 다다를 때 이전의 모든 경험에도 불구하고 ‘문맹’이 될 수밖에 없다는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말 속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
6. 이 사회의 공론장에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사막 메타포를 적용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 사이에 사막이 있다. 그 사막에 가기 싫다.’

덧. ‘문맹’이라는 용어를 쓸 때마다 다른 용어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고유명사를 차용하여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 그대로 썼다.

#삶을위한리터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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