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소유가 아닌 가로지르기

1.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 자녀를 ‘한국어-영어 바이링궐/바이컬처럴’로 키우길 바라는 나라에서 ‘다문화-‘는 차별과 배제의 접두사다. ‘글로벌 시티즌’이 될 것을 주문하는 사회임에도 ‘다문화교육은 다문화가족 구성원에게나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만연해 있다. 이같은 자기분열적 인식은 외국어 문화자본과 계급간의 일그러진 관계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대다수 국민에게 ‘외국어’에 속하는 언어는 영어를 비롯해 몇 개 되지 않는 현실인 것이다.

2. 장면 1. 한 카페.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각자 노트북을 놓고 여행 계획을 짜고 있다. 책상에는 유럽 여행 책자 몇 권이 널브러져 있다.

“사진 볼래? 지난 번에 갔다 오면서 찍은 거.”
– “어어 보자.”
“이건 OOO고… 이건 OO…”
–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저 장애인은 누구냐?”
“누구긴 누구냐 나지. 새X야.”

겉으로 보기에 두 사람은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장면 2. 하교시간, 교복 입은 남자 고등학생 두 명.

“야 음료수 사줘.”
– “내가 왜 사. 이 ㅆㅂㄴ아.”
“지난 번에 샀잖아. ㅆㅂㄴ 기억도 못하냐?”
– “웃기고 있네.”

두 남고생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여성을 극도로 비하하는 욕설로 서로를 부르고 있었다. ‘유쾌한 우정의 과시’였을까? 남자를 비하하는 상황에 왜 여성에 대한 비속어를 쓰고 있는 것일까.

어제 오늘 겪은 두 장면은 일상어에 스며든 장애인, 여성 차별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들은 아마 ‘장애인을 비하하지도 않았고, 여성혐오를 드러내지도 않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구체적 대상을 향해 표출되는 차별과 혐오는 내면에 스며든 차별과 혐오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는 사실이다.

3. 테이블에 둘러 앉아 한 학생의 교과서 필기를 열심히 베끼는 사람들. 공부 잘한다는 학생의 필기이니 믿을만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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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모두 어머니들이었다.
자식의 글을 대신 써주고 자식의 삶을 대신 사는 이들. 그리고 이를 강제하는 구조.

친구의 이야기에 입안에 쓴맛이 돌았다.

4. 어떤 책을 읽느냐는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어떻게 읽느냐, 나아가 어떻게 사느냐다.

이와 관련하여 J. Rufus Fears 교수는 한 강연에서 Dietrich Bonhoeffer와 Otto Thorbeck의 악연에 관해 이야기한다. 두 사람 모두 성경과 일리아드, 소포클레스의 저서 등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독일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으면서 다양한 고전을 접했던 것이다. 하지만 신학자이며 목회자였던 Bonhoeffer는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했다가 붙잡혀 Thorbeck으로부터 사형을 선고받는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다른 자리에 앉게 했을까?

5. 나에게 읽기는 문자 조합의 해독(decoding)이 아니라, 삶의 연장(extension)에 가깝다. 물론 텍스트의 의미를 충실히 읽어내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읽어낸 텍스트는 어디로 향하는가? 어디에 녹아드는가? 그 방향이, 자리가 중요하다. 결국, 어떻게 읽는가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다.

한국 영어교육을 생각할 때 가장 갑갑한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해독에 발이 묶여 해석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행위로의 도약은 꿈도 꾸지 못한다는 것.

6. 이런 의미에서 행간읽기(reading between the lines)는 행간쓰기(writing between the lines)로, 이는 다시 선을 넘어서 살기(living beyond the lines)로 확장되어야 한다. 행간은 읽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쓰는 것이고 이를 통해 다른 삶을 사는 행위인 것이다.

저자의 말이 만들어 낸 행간은 해석의 공간이 되고 나아가 삶의 자리가 된다. 우리는 타인의 삶의 궤적으로 우리 삶의 자리를 구획한다. 놀라운 것은 구획의 목표가 가로지르기에 있다는 것이다.

7. 소유所有가 아닌 월경越境의 독서를 꿈꾼다.

#삶을위한리터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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