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오다

Posted by on Jul 12, 2019 in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짝의 장기 근속 휴가 덕분에 생애 가장 긴 여행을 다녀왔다. 무계획과 빈틈으로 일관한 나를 인내와 미소로 이끌며 16일 간의 멋진 여행을 만들어 준 짝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하루 2만 여 보를 걸으며 런던, 에든버러, 파리를 살폈다. 수박 겉핥기도 안되는 배움이었지만 기쁘고 성실하게 걸었다. 마음의 손바닥을 펴면 반짝일 작은 순간들을 모았다. 바람이 훅 불면 흔적도 없이 날아가겠지만, 잠시 내 손을 거쳐간 빛이 있었다는 걸 잊지 않을 것이다.

텍스트와 멀어졌다. 쓰기와 읽기 모두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평상시의 페이스를 회복하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사실 그게 좋았다. 멀어졌다가 다시 천천히 가까와질 수 있다는 것. 문해력에 대해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문해의 바깥으로 한 발을 내딛어 보는 것. 다른 세상을 기웃거리는 것.

사랑하는 음악과도 멀어졌다. 보름간 이어폰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사적인 음악감상은 사라졌다. 거리의 다양한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산책로 울창한 나무들의 새소리에 들떴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러고도 음악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음악만은 아닐 것 같다. 사랑이라는 말은 꽤나 습관적이고 수사적인 것.

그렇게 집에서, 글에서, 음악에서 멀어졌다. 그렇다고 나 자신과 가까워졌느냐 하면 그건 또 모르겠다. 기말 2주간의 폭풍같은 시간을 보내고 노곤해질 때로 노곤해진 상황에서 쉼없이 걷기가 수월하진 않았고, 그저 걷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욱신거리는 다리가 몸 전체를 장악하자 자신과 가까와질 틈새는 사라졌다. 굳이 가까워진 것을 찾으라면 나 자신의 연약함 아니었을까.

쌓아놓은 일들을 해야 한다고 되뇌인다. 문득 지금 앞에 놓인 일들이 세상을 둘러보는 일보다, 짝과의 동행보다, 쉼없이 걷기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로부터 멀어지는 것보다 중요한지 묻는다. 삶이 짧은 것이 아니라 나의 우둔함이 긴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잠긴다.

천착하기 만큼이나 끊어내기가 소중하다는 가르침을 준 여정. 그렇게 똑같은/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Eva Cassidy – Time After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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