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고 듣는 주체의 비대칭성

어떤 고민

설명을 할 때는
듣는 사람을 고려하기 마련이다.
초등학생과 중고생, 또 성인에게
같은 언어와 예시로 설명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언제나 예외는 존재한다!)

다시 말해,
말할 때에는
듣는 이의 복수성을
자연스럽게 상정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에 따라
내 말은 변주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듣거나 읽을 때는 다르다.
듣거나 읽을 때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단 하나의 청자와 단 하나의 독자
즉 자기 자신만을 고려하는 경향이 있다.

나의 경험과
나의 생각과
나의 감정과
나의 지식을 기반으로
듣고 읽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내가 듣고
내가 읽고
내가 이해한다.

그렇기에,
나에게 들리지 않고
나에게 읽히지 않고
나에게 이해되지 않는 말글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 판단하기 일쑤다.

말하거나 쓸 때에는
청자와 독자를 고려하지만
듣거나 읽을 때에는
오직 하나의 청자와 독자만을 상정하는
리터러시 행위의 비대칭성.

여기에 많은 문제가 담겨 있다는 생각이다.

유연하게 말하고 쓰는 것이 중요하듯
여러 사람이 되어 듣고 읽어내는 일이 필요할 듯한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리터러시를 논의함에 있어
‘올바른 독법’만을 강조하는 것은
한계가 뚜렷하다.

정확히 읽어내는 것과
누구로 읽어내느냐의 문제는
결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정확한 읽기만큼이나
누가 되어 읽는지.
뒤집어 말하면
말글을 접할 때
어떤 존재가 되는지 살펴야 한다.

정답을 강조하는 리터러시 교육은
단 하나의 존재를 상정한다.
이는 이상화된 독자(idealized reader)인데,
실제 삶에서 이 이상화된 독자는
자기 자신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잘 읽는다는 것은
텍스트의 숨겨진 뜻을 파악하는 일을 넘어
이상화된 독자를 해체하고
다양한 해석의 주체가 되어보는 일을 포괄한다.

이 사회의 획일화된 교육이
일분일초를 다투어야 하는 사회체제가
이런 읽기를 꿈도 꾸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그런데 나는 왜
새벽 잠을 설치고
몇 시간을 뒤척거리다가
이런 해상도 떨어지는 글을 쓰고 있는가.

구멍 숭숭 생각이지만
계속 생각하고 발전시켜 보기로 한다.

#삶을위한리터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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