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영상: 상상력(imagination)과 지각(perception)이 만들어 내는 인지 생태계의 변화

1. 적지 않은 이들이 소설의 영화화에 불만을 터뜨린다. “내가 알던 소설은 이게 아닌데 영화가 말아먹었다”고 외치곤 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 공식에서 벗어나는 영화에는 극찬을 아끼지 않게 된다.

2. 실제로 영화가 망작인 경우도 많고 연출력이 달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제작비가 부족한 경우도 비일비재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실망하는 데는 이 외에도 몇 가지 근본적인 요인이 더 있는 것 같다.

3. 우선 ‘새것 효과’다.소설을 통해 캐릭터와 내러티브를 처음 접할 때의 신선함이 영화에서는 떨어진다. 이 점은 굉장히 직관적이다. 뭐든 두 번 보면 새로운 작품이 주는 짜릿함을 찾기 힘든 것이다.

4. 다음으로는 디테일의 차이다. 대개의 경우 소설의 내용 전부를 영화화하긴 어려우며, 감독과 작가는 취사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특정한 부분이 강조되고 ‘줌업’되어 그려진다. 여기에서 기존 스토리의 일부분은 ‘누락’되고 촘촘한 디테일을 기대하는 관객은 여기에 실망할 수밖에 없다.

5. 무엇보다 텍스트와 영상이라는 매체의 근본적 차이가 실망을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텍스트는 문자의 배열을 통해 세계를 ‘그려낸다’. 여기에서 ‘그려낸다’는 단어의 중의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6. 먼저 작가가 세계를 그려낸다. 이 경우 그려냄의 결과는 텍스트, 즉 문자의 배열이다. 다음으로 독자의 ‘그려냄’이다. 이 경우 독자는 텍스트를 재료로 작품 속 세계를 머리속에 상상해 낸다. 이 경우 산출물은 5감의 간접경험을 수반하는 신경의 활성화 패턴이다. 많은 이들은 종이 위의 꼬불꼬불한 잉크자국이 독자의 머리를 ‘마비시키는’ 경험을 마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7.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소설이 그려내는 세계의 복수성이 탄생한다. A와 B가 같은 소설을 읽었다고 하자. 비슷한 속도로 정독을 했다. 그렇다고 A와 B의 머리속에서 같은 일이 일어났을까? 아닐 것이다. 같은 텍스트를 재료로 했다고 해도 그들의 상상(imagination)은 사뭇 다르게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독자가 가진 경험과 지식, 기대와 독서전략의 차이가 상상력과 스타일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8. 따라서 A와 B의 독서는 같은 텍스트에서 다른 세계를 그린 경험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전체 줄거리는 비슷하게 기억한다 하더라도,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지나는 지적, 정서적 여정은 사뭇 달랐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9. 이번에는 영상을 보자. 두 사람이 집중하여 하나의 영화를 보았다.이 경우 두 사람은 완벽하게 같은 영화를 보았을까?

10. 사실 그럴 수는 없다. 어떠한 자극도 서로 다른 유기체에 동일한 영향을 줄 수는 없다. 인상깊게 본 장면이나 기억에 남는 대사가 다를 것이고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디테일 또한 있을 것이다.

11. 하지만 한 가지는 자명하다. 두 독자가 텍스트를 재료로 그려낸 바 보다는 두 관객이 영상을 통해 접한 바가 훨씬 더 유사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전자의 경우 상상(imagination)의 힘이 강하게 작용한다면 후자의 경우는 지각(perception)이 단연 우세하기 때문이다.

12.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이 있다. 책의 위기와 영상의 두각을 논의하는 것은 매체(media)의 권력관계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매체의 변화는 결국 인간의 간접경험이 상상이라는 엔진을 쓰느냐 지각이라는 엔진을 쓰느냐의 문제로 봐야 하는 것이다.

13. 다시 말해, 매체의 변화는 미디어의 변화라는 외피를 넘어 인지(cognition)의 변화를 수반한다. 이는 인류의 인지 생태계(cognitive ecology)의 급격한 변화를 야기한다. 따라서 ‘책이냐 영상이냐’는 생각의 생태계의 지각변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관점에서 논의되어야만 한다.

14. 맥루한의 책 제목을 살짝 뒤틀자면 “미디어는 메시지”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뇌를 어떻게 마사지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류의 뇌를 마사지하는 주요 도구가 변화하고 있고, 그 결과 두뇌가 소통하는 방식도 달라질 것이다.

15. 미디어의 세계가 묻고 있다.
“뇌를 어떻게 마사지해 드릴까요?”

#삶을위한리터러시 #책과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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