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화 reification 와 명사화 nominalization

“톰슨은 『이데올로기 이론 연구Studies in the Theory of Ideology』(1984)와 『이데올로기와 현대 문화Ideology and Modern Culture』(1990)에서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을 정당화legitimation, 위장dissimulation, 통합unification, 분열fragmentation, 물화reification라는 다섯 가지로 구별한다.”

(1) ‘정당화’는 지배관계를 ‘정당한, 즉 공정하고 지지할 만한 것으로 제시하여’(1990: 61) 그 관계를 정립하고 유지하는 과정이다.

(2) ‘위장’은 지배관계를 숨기거나 모호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3) ‘통합과 분열’은 서로 반대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연관된다. 통합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사람들을 통합하고 하나로 묶어내고자 하는 반면, 분열은 사람들을 서로 분리시키고자 한다.

(4) ‘물화’는 톰슨의 이데올로기 작동 방식에서 가장 마지막 단계이다. 물화한다는 것은 하나의 과정을 하나의 사물 혹은 사건으로 변환시킨다는 뜻이다. 과정은 행위자가 있고,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담고 있는 동사로 표현된다. 하지만 물화된 사물은 사회-역사적 기원이 은폐된 채 행위자와 행위 없이 그냥 그렇게 존재한다.

— 이상 <리터러시와 권력> (사회평론, 2019) 3장 ‘언어와 권력’에서 발췌

톰슨의 이데올로기 작동방식에서 ‘물화’와 깊은 관련을 갖는 언어현상으로 명사화(nominalization)가 있다. 세계는 중단없는 시간의 흐름과 물리적 변화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becoming)된다. 하지만 명사는 이러한 역동의 상태를 경계가 반듯하며 굳어진 개념으로 포획한다. 이는 인간의 언어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이자 세계를 구획화하는 강력한 무기이다. 물화와 관련해서 이전에 썼던 글을 업데이트하여 아래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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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한계 중에 하나는 바로 명사표현이 만들어 내는 효과와 인상입니다. 오늘은 성경구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를 들어 언어의 ‘은밀한 함정’ 두 가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입말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순차적으로 발화됩니다. 글로 써 놓아도 그것을 읽어내는 행위는 시간 속에서 전개되지요. 한 문장이 일시에 이해되거나 발화될 수는 없습니다. 문단이나 글의 경우엔 더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

따라서 위의 구절은 “진-리-가-너-희-를…”과 같이 발화되고 이해됩니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리가 퍼져나가므로 진리 다음에 자유가 나오게 되죠. 흐르는 시간에 얹히는 말소리는 결코 한 순간에 응축될 수 없습니다. ‘진리’와 ‘자유’가 동시에 포개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언어라는 매체가 갖는 시간적 한계가 있습니다. 언어는 때로 존재하지 않거나 부적절한 선후관계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진리’ 다음에 ‘자유’가 오는 언어 구조가 저 말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담보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언어가 갖는 선형성(linearity)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차적으로 전개되는 언어는 복잡다단한 요인들이 동시에 작동하는 세계를 제대로 포착할 수 있을까요?

아울러 생각해 볼 지점은 “진리” 그리고 “자유”가 명사라는 사실입니다. 중학교 때 배운 “명사는 사물의 이름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설명을 떠올리면, “진리는 OOO이다”라는 식의 딱 떨어지는 정의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진리가 사물이나 장소를 나타내는 명사라면 ‘소유하거나 소유하지 못하는 것’ 혹은 ‘도달하거나 도달할 수 없는 장소’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여기서 명사표현의 이분법적 도식(소유의 여부 혹은 도달 여부)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제가 이해하기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네게 진리가 있어? 그럼 넌 자유로운 거야!’라거나 ‘진리를 모른다고? 그럼 자유로울 자격이 없군!’과 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언어표현의 한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좀더 정확한 의미는 아마도 다음과 같지 않을까요?

“진리를 알아가는 점진적 과정은 조금씩 자유케 되는 과정을 내포한다. 이 두 과정은 서로 교섭하며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변화시킨다.”

물론 이 문장에서 사용된 “과정”이라는 단어 또한 명사이므로 구절의 의미를 드러내는 데 분명한 한계가 있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진리”와 ‘자유’라는 명사가 개별적으로 쓰였을 경우 주는 느낌에서 조금 벗어나긴 한 것 같습니다. 진리를 소유하거나 거기에 도착한 상태가 아니라, 실천하고 아는 과정으로서의 진리를 강조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또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안다”고 하는 동사는 대개 “그 사람 이름을 안다”나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것을 안다”와 같이 특정 지식을 갖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이 과연 행위가 아닌 상태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진리를 안다/모른다는 이분법은 형식논리학의 구조에서는 가능할 지 모르지만, 우리 삶에서 실제로 존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행하는 것 사이의 명확한 구분은 존재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앎’과 ‘함’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죠. 이런 생각을 밀어부치면 언어는 복잡다단한 세계를 표현하기에는 참 부족한 매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진리와 자유의 관계를 선후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언어, 진리나 자유를 명사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혹은 표현하도록 강요하는 언어 속에서 우리가 놓치는 그 무언가가 있습니다. 진리와 자유는 노력하면 획득할 수 있는 상태라기 보다는 끊임없는 상호작용과 변화의 과정일 테니까요.

언제나 언어와 삶을 엮어서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세계는 언어를 통해 물화reification되지만, 삶은 언제나 운동하고 생성되며 변화하고 있습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인지언어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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