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vs. (유튜브) 영상’ 구도에 관하여

1.

인류의 역사에서 읽기는 기껏해야 수천 년 지속되어 온 관행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읽기가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구텐베르크 은하계 이후의 일로 몇백 년 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다. 사실 한국에서 리터러시가 널리 퍼진 것은 한국전쟁 이후, 길게 잡아야 20세기 초중반 정도로 보아야 한다. (필자의 조부모 세대만 해도 문자를 통한 학습과 소통이 모든 이들에게 ‘혀락된’ 것은 아니었다. 부모세대가 되어서야 대중화된 것이다.)

듣기와 말하기는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능력이지만 쓰기와 읽기는 그렇지 않다. 철저히 문화적인 산물이며 학습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문자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글자가 없어도 살아가는 데 별 문제가 없다. 리터러시의 중요성은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필요가 아니라 개별 사회의 문화적, 제도적, 경제적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2.

유튜브의 부상은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사실 인류 역사상 짧디 짧은 읽기의 시대가 말하기에 ‘지분을 넘겨주고 있는’ 상황으로 볼 수 있다. 테크놀로지가 전혀 새로운 경험을 가능하게 했다기 보다는 말하고 듣기만큼 오랜 경험을 이전에 가능하지 않았던 스케일로 펼쳐놓은 것이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느끼듯이) 언급한 지분의 이양 속도가 예상 외로 빠르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활자 미디어의 죽음을 논하는 것은 과함을 넘어 엄살에 가까운 일이지만, 새로운 세대들이 유튜브를 비롯한 다양한 동영상 플랫폼에 급속히 포섭되고 있다는 점은 반박하기 힘들다.

3.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종종 놓치는 것들이 있다. 먼저 우리는 그 어떤 시대보다 메신저와 소셜미디어에 글쓰기를 많이 한다. 엄밀한 통계를 잡을 수는 없지만 글은 쇠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융성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으로 유튜브의 많은 영상들은 글을 기반으로 한다. 말의 외피를 입고 있으되 아이디어 수준에서 영상에 이르기까지의 중간 과정에서 다양한 텍스트들이 개입하는 것이다. 멋진 말의 기반에는 대개 깊은 글이 있다.

세째, 유튜브의 적지 않은 영상들은 ‘하이브리드 모드’이다. 말이 주요한 매체로 작동하지만 자막이나 참고자료 등에 문자가 상당히 많이 사용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유튜브를 마냥 ‘음성언어’로 취급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마지막으로, 여전히 ‘고급’ 커뮤니케이션은 글로 매개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과학 커뮤니케이션이다. 멀티미디어를 기반으로 하는 논문을 내는 곳도 있지만 이는 예외중에서도 예외이다. 논문은 글로 구성되어야 하고, 이 글을 써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의 리터러시 훈련이 필수다.

이렇게 놓고 보면 ‘리터러시의 몰락과 음성/영상 플랫폼의 부상’이라는 구도는 허술하기 짝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전통적 문자 기반 리터러시냐 유튜브 리터러시냐는 이분법 또한 현재의 상황을 적절히 포착하지 못한다.

4.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텍스트 vs. (유튜브) 영상’ 구도는 현재의 미디어 지형 변화를 포착하기에 적절한가? 아니면 과도한 단순화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이 필요하다.

흔히 퉁쳐 말하는 ‘유튜브 영상’이라는 게 있을까? 그런 게 하나의 장르적 특성을 지닌 미디어로 존재할까? 아니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그때그때 갖다 쓰는 것일까? 그런 면에서 ‘텍스트의 시대가 가고 유튜브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말은 얼마나 (부)정확한 말일까?

마찬가지로 ‘텍스트’라는 건 어떤 특징을 가진 글을 의미하는가? 텍스트의 시대가 가고 있다고 하지만 웹소설 시장은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하지 않나? 소셜미디어의 포스팅과 카톡으로 대표되는 채팅, 여전히 막강한 블로그의 텍스트는 과연 줄어들고 있나?

위에서 밝혔듯 나는 매체적 특성을 중심으로 현재의 변화를 조망하는 것은 자칫 ‘매체환원주의’에 빠질 염려가 있다고 생각한다. ‘글읽는 시간 vs. 영상시청 시간’의 통계의 이면에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매체와의 상호작용 방식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5.

딱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페이스북에서 1-2문단 이하의 단문을 주로 올리는 이들과 긴 글을 즐겨 올리는 이들이 있다. 둘의 중간쯤 있는 글은 짧게짧게 쳐서 문장이 아닌 구를 아래로 길게 늘어뜨리는 스타일을 구사하는 이들이다.

독자에 따라 차이가 있겠으나 이동중에 긴 글을 읽기 위해서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일례로 7-8 문단 정도가 되는 글을 읽는다고 하면 ‘휘리릭 보기’가 불가능하고, 휘리릭이 안되는 글을 보기 위해서는 지적, 정서적 버퍼가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는 일정한 정도의 의지도 동원된다. 읽어내겠다는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읽히지 않는 게 긴 글이다.

소설을 읽을 때는 좀더 긴 호흡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나의 경우 500 쪽 정도의 장편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초반 100 쪽 정도까지는 어느 정도의 인내심을 유지해야 한다. 배경과 인물, 사건의 얼개, 대략의 갈등구도가 드러날 때까지는 이야기를 온전히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텍스트라 하더라도 그 성격과 길이에 따라서 동원되는 인지, 정서, 의지적 자원이 사뭇 다르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같은 관찰은 영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6.

(이런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소위 ‘예술영화’를 읽어낼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서 ‘읽어내다’라는 동사를 쓴 것은 의도적이다. 그냥 보는 것과는 다르게 영화를 주체적으로 소화해야만 가능한 이해방식을 가리키기 위해서다.

영화 읽어내기는 인터넷을 점령한 ‘냥이 비디오’ 감상과는 전혀 다른 행위다. 후자의 경우는 ‘그냥 보고 있으면’ 되지만 전자는 그렇지 않다. 물론 이 두 가지의 영상시청 사이에 다양한 시청법이 존재한다.

7.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텍스트 읽기 vs 영상 시청’이라는 구도는 과도한 단순화를 수반한다. ‘휘리릭 볼 수 있는 텍스트’도 있고 ‘공들여 읽어내야 할 영상’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미디엄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장르들, 그 장르를 제대로 소화하기 위한 독법들, 이를 익히기 위해 필요한 훈련과 경험. 이들을 고려하지 않고 ‘텍스트 대 영상’의 구도를 들이대는 것은 때로 현재의 변화를 분석적으로 보지 못하게 한다.

그럼에도 영상의 급부상은 우리가 정보를 대하는 태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논의하려고 한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유튜브리터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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