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언어, 민주화에 대한 단상 몇 가지.

“내 어머니의 언어로 철학하고 싶다”

언젠가 올린 트윗 전문이다. 이 구절은 리터러시와 관련하여 화두가 되었고, 조금 바뀐 워딩으로 이전 저작 <어머니와 나>의 표지에 실렸다. 여전히 종종 이 말을 되뇌곤 한다.

어머니는 종종 “인생과 영어를 엮어서 가르치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냥 영어만 가르치면 마음 깊이 자리잡지 못하니 사람들이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인생의 이야기들과 엮으라는 말씀이셨다.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오랜 시간 고민해 온 ‘삶을 위한 영어공부’라는 어구를 떠올리게 된다.

“어려운 생각은 어려운 언어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라는 말에는 절반만 동의한다. 깊고 복잡한 생각이 있고, 그것을 글로 썼을 때 복잡해 질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음을 알기에 동의하는 것이다. 사상과 지식의 깊이와 너비를 조망하지 않고 무조건 쉽게 쓰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지의 폭력에 다름아니다.

하지만 학문적 사고와 난해한 언어를 무조건 연결하는 것은 하나의 사회문화적 경향이기도 하다. 이 경향은 심화될 수도 완화될 수도 있다. 어려울 수밖에 없어서 어려운 글도 있지만, 어려운 것으로 담장을 치는 집단이 있고 어렵게 쓰는 것이 인정받는 문화가 있기에 어려운 글도 있다. 지식의 형식과 구조에 대응하는 복잡함이 아닌 사회문화적 게이트키핑으로서의 난해함도 있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어려운 건 어려울 수밖에 없으니 더 공부하라”라는 말이 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 적절성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엘리트주의로 흐를 위험이 무척이나 높다고 생각한다. 내 공부가 짧은 탓이지만, 언어학의 인접 분야를 읽어내는 것도 힘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이건 아니지 않나, 투덜거린다.

리터러시(읽고 쓰는 능력)는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다면적 리터러시가 등장하고, 다양한 매체를 능숙하게 다루는 능력의 습득은 날로 어려워지고 있다. 실질적 민주주의는 점점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리터러시의 책임을 개별 독자들에게 모두 전가하는 것은 사태의 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리터러시는 단지 글을 잘 읽어내는 능력이 아니라 상황에 맞는 글을 써내는 능력이기도 하다. 쓰고 읽는 능력은 맞물려 돌아가며 리터러시 생태계를 이룬다. 둘 사이에 균형이 필요한 것이다.

정확한 워딩은 아니나 아인슈타인은 “모든 것은 최대한 단순화되어야 한다. 하지만 (본질을 잃을 정도로) 단순화시켜서는 안된다. (Everything should be made as simple as possible, but not simpler.)”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이 말이 리터러시에 대해 주는 교훈을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다시, “어머니의 언어로 철학하고 싶다.”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

어머니의 언어를 듣고, 어머니의 언어를 이해하고, 그 언어로 사고해 보고, 나아가 그 언어로 생산해 보는 일. 그것이 답이라면 리터러시의 미래는 텍스트와 미디어가 아니라 사람들 속에,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 아닐까.

#삶을위한리터러시 #어머니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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