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그들의 문장은 어떤 세계를 담는가? – 문법을 보는 새로운 가능성과 리터러시 교육에 대하여

1. 문법은 문장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규칙이기 이전에 세계의 중단없는 사태를 분절적 텍스트로 변환하는 도구이다.

2. <단단한 영어공부>에서도 논의했듯 우리는 문법을 ‘형법’으로 배워왔다. 조항을 외워서 틀리고 맞고를 판단하는 도구로 사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문법의 본질은 우리의 물리적, 심리적 세계를 텍스트화하는 도구라는 사실에 있다. 그런 면에서 문법책은 ‘형법서’가 아닌 ‘마법상자’가 되어야 한다.

3. 세계는 문법을 거쳐 어휘의 옷을 입고 텍스트가 된다. 내가 바라보는 우주는 소포로 싸서 배송할 수 없지만 텍스트는 어디든 갈 수 있다. 나의 경험에서 비롯된 감정과 생각은 나의 뇌와 몸에 ‘갇혀’ 있지만 문법의 도움으로 텍스트화되어 누구에게든 가 닿을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최초의 가상현실(VR)은 최근의 IT 기술이 아니라 텍스트의 발전에서 이미 구현된 것이다!

4.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문법을 좀더 크게 이해할 수 있다. 단지 텍스트 뿐 아니라 세계와 의식이 특정 매체(텍스트, 영화, 만화, 그림, 웹툰 등)로 변환되는 방식을 총칭하는 메타용어(meta-terminology)로 생각하는 것이다. 세계가 영상으로 변환되는 일련의 규칙들을 영화의 문법이라 할 수 있고, 일상이 웹툰으로 전환되는 데 동원되는 기법들을 웹툰의 문법이라 할 수 있다. 매체마다 다른 문법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세계가 변환되는 데 개입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위상을 지닌다.

5. 다시 언어로 돌아와 보자. 시스템-기능 언어학(SFL: Systemic Functional Linguistics)에 따르면 문법은 물리적, 심리적 세계에서 특정 참여자(participants)를 ‘캐스팅’하고, 이들과 관련된 과정(processes)을 설정하고, 참여자들과 과정이 어떤 환경(circumstances)의 영향을 받는지 설명한다. 예를 들면 누가, 무엇을, 언제/어디서 했는지를 텍스트화하는 것이 문법의 역할이다.

6. 여기에서 비판적 읽기의 가능성이 도출된다. 텍스트는 세계를 특정한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에 따라 참여자와 과정, 환경을 제시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도구로 동원되는 것이 문법이다. 따라서 비판적 읽기는 ‘누가 캐스팅되었는가’, ‘왜 이 과정이 부각되었는가’, ‘제시된 환경은 가장 중요한 환경인가’를 따져물을 수 있다.

7. 안타깝게도 한국 영어교육에서 문법은 ‘문장의 규칙’이라는 틀에 갇혀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문법의 이런 기능도 중요하다. 하지만 더욱 근본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인지하는 세계의 총체에서 어떤 참여자들을 불러내고 어떤 관계들을 설정하고, 어떤 환경 하에 놓여있다고 진술할 것인가이다. 우주가 텍스트가 되어 책에 담기는 일련의 메커니즘에 대한 비판과 성찰이 필요한 이유다.

8. 이 점에서 문법은 비판적 리터러시 교육과 만난다. ‘이 문장이 문법적으로 옳은가 그른가?’를 넘어 ‘이 문장의 캐스팅은 적절한가?’라고 물어야 한다. ‘이 문장에서 3인칭 단수가 s가 제대로 쓰이지 않았다’라고 말하기 이전에 ‘왜 이 문장은 3인칭으로 진술되었을까’라고 물어야 한다. ‘이건 부사구이니 5형식을 판단하는 데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기 전에 ‘왜 수많은 환경 중에서 이 내용이 부사구로 선정되었을까’라고 질문해야 한다.

9. 나아가 그들의 대안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이 텍스트는 이렇게 쓰여질 수밖에 없는가?’ ‘어떤 사회문화적 조건이 이런 텍스트를 만들어 내었는가?’와 같은 질문이 핵심이다.

10. <단단한 영어공부>에는 영어의 수동태에 대한 비판적 읽기에 대한 언급이 있다. 한 독자는 이 부분을 보고 ‘너무 오버한다’고 평가를 하기도 했지만, 문장의 문법적 특징이 담론의 질서를 은밀히 코드화한다는 지적은 이의를 달기 힘든 공리와도 같은 주장이다.

11. James P. Gee의 지적과 같이 문법은 선택의 시스템(a system of choices)이며, 선택에는 의도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 다만 누군가는 그 선택을 좀더 면밀하게 따져들고 다른 누군가는 아무 생각없이 내지를 뿐이다.

12. 그런 맥락에서 문법교육의 목표 중 하나는 ‘선택의 무게’에 대한 인식을 키우는 것이며, 이는 리터러시 교육의 핵심적 원리가 되어야 한다.

텍스트의 세계는 선택된 세계이다.
우리의 선택에는 윤리가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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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태의 정치학

이번에는 수동태를 살펴볼까요. 수동태를 공부할 때는 수동태의 형태(be + 과거분사+by~)보다는 수동태가 묘사하는 여러 사건들에서 수동의 개념을 이끌어 내고, 그것이 어떻게 언어로 표현되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다음 두 문장을 봅시다.

(1) Many immigrants are deprived of their rights.
(많은 이민자들은 권리를 박탈당한다.)
(2) The current immigration laws deprive many
immigrants of their rights. (현재의 이민법은 많은 이민자들에게서 권리를 박탈한다.)

두 문장은 하나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동태 문장 (1)에서는 ‘박탈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이민자들의 현재 상태만 그려 냅니다. 하지만 능동태 문장 (2)에서는 이민자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주체가 드러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현재의 이민법을 입안하고 가결한 사람들이 존재하겠지요. 이 같은 분석을 통해 수동태라는 언어적 장치에서 인간이 경험적 세계를 이해하고 의미 세계를 창조하는 방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한 능동태나 수동태를 선택하는 일이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는 사실, 즉 ‘수동태의 정치학’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단단한 영어공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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