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스케치

Posted by on Oct 21, 2019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 No Comments

이번 학기 나름 여유롭게 산다. 종종 늦잠도 자고 멍도 때린다. 지난 주부터는 건반에도 조금씩 손을 대고 있다. 그래봐야 적극적으로 게으름을 피울 정도는 아니지만 강의가 줄어드니 확실히 덜 쫓기는 것 같다. 회사생활과 박사과정을 포함해서 20년 만에 가장 덜 분주한 시절이다. 새로운 과목 예닐곱 개를 가르치던 게 과연 나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그렇게는 못할 거 같다.

일이 엄청나게 준 것은 아니다. 강의는 반토막났지만 생계형 외부 강의가 늘었고 새로운 책도 준비하고 있다. (무려 세 분이 ‘이거 아니냐’며 물어오셨는데, <지극히 주관적인 어휘집>은 아닙니다. 책으로 내기에는 아직 그저 잡다구리한 생각들이죠.) 곰곰 생각해 보니 학기말에 누군가를 평가해서 줄을 세워야 하는 부담이 반으로 줄어서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 같다. (대학에서 무조건 상대평가를 강제하는 관행은 사라져야 한다고 믿는다.)

취업을 위해서는 더욱 열심히 논문을 써야 하지만 마음이 좀처럼 동하지 않는다. 대학에 대한 애증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뒤덮는 절망이 스물스물 자리를 잡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포자기는 아니지만 “쓰지 않으면 죽는다(publish or perish)” 마인드를 탑재할 수는 없는 상황이랄까. 엉거주춤한 자세로 몇 년을 살다보니 나름 이 자세가 편해졌나 보다. 의미 찾다가 굶을 것도 같은데 안되는 건 안되는 것이다.

주말에 사려깊은 학생 둘이 찾아왔다. 냉면을 먹고 산책을 하고 커피를 마셨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저릿했다. ‘이 친구들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뭔가를 가르친다고 설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스쳐간 학생들이 꽤나 많아졌다. 가르칠수록 부끄러운 일들이 많아진다. 지식을 전수한다며 무지를 방관하는 세월이 쌓여간다. 아는 척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길을 잃고 낙심한 나를 일으켜 준 건 언제나 학생들이었다. 고맙고 미안하고 자랑스럽다. 내내 평안하기를. 각자의 자리에서 더 열심히 싸울 수 있기를. 함께 나눈 이야기가 어두운 시절을 밝히는 작은 빛이 될 수 있기를. 무엇보다 강건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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