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터러시, 망각에 대항하다

1. 긴 글을 읽고 쓴다는 것, 특히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긴 호흡의 대화를 꾀하는 일은 인간의 ‘단기기억’에 대한 사회문화적 반역이다. 하루만 지나도, 아니 문지방만 넘어도, 냉장고 문만 열어도 삶의 흐름을 놓치는 우리를 구해내려는 필사의 노력이다. 구텐베르크 은하계 이후 인류는 본격적으로 텍스트를 매개로 한 기억을 축적해 왔다. 텍스트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문자를 기반으로 한 기억의 물화와 공유가 문명의 인프라를 이루고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었음을 부인할 순 없다.

2. 책이라는 매체의 특징은 그것이 문자로 이루어졌다는 것 만큼이나 엮어내는 데 오랜 시간을 요한다는 데 있다. 집필의 과정에서 작가는 시간과 경험을 단어에, 문장에, 그리고 행간에 새겨넣는다. 편집자는 그 과정 하나하나를 모니터하며 텍스트의 방향을 설정하고 스타일을 잡아나간다. 긴긴 시간은 압축되어 텍스트에 담긴다. 점과 같은 짧은 시간은 확대되어 다차원으로 해석된다.

3. 그렇게 시간을 가로지르며 엮어낸 시간, 경험, 개념, 관점이 ‘우리의 기억’으로 확산되고 재창조되는 과정에서 텍스트의 가치가 드러난다. 세계는 텍스트를 매개로 기록되고, 이것은 다시 우리 머릿속의 기억이 되어 삶을 이해하는 틀이 되고 하루를 살아낼 다짐이 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정보가 된다. 그런 면에서 책은 시간여행의 도구와는 다른 시간-변형의 기계다.

4. <빅데이터 인문학: 진격의 서막>은 구글북스의 N그램 뷰어 데이터에 기반하여 인류의 집단기억이 점점 더 단기 이슈에 집중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유행어의 생애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만으로 우리가 집단 기억상실을 앓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논의되는 이슈가 더 많이, 더 빠르게 등장하고 사라진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실시간 검색어 순위와 타임라인에 기억을 담아놓고 좀처럼 다시 돌아보지 않는다. 명멸하는 이슈는 불꽃놀이처럼 순식간에 사라진다. 또 다른 불꽃들이 등장하고 우리는 다시 넋을 잃고 바라본다. 불꽃은 스냅샷으로 남을 뿐 서사가, 지혜가 되지 못한다.

5. 우리는 영상 미디어의 급성장과 책으로 대변되는 전통미디어의 쇠락이 어떤 인지적, 사회적 결과를 초래할지 아직 잘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미디어 생태계의 변화가 긴 텍스트를 쓰고 읽고 토론하는 가운데 얻을 수 있는 인간과 역사에 대한 감각을 보존하고 확장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반드시 텍스트여야 한다든가, 영상이라 안되고 인터넷이라 안된다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슈가 등장과 동시에 퇴장한다는 것, 미디어 생산소비의 호흡이 짧아진다는 것은 우리가 담론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은 명확하다.

6. 그런 면에서 리터러시의 교육의 방향을 정함에 있어 ‘잊지 않는 힘’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의 문제는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다양한 지식의 편재, 검색효율의 증가에 따라 암기의 중요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시대, 이러한 변화가 망각을 부추기는 기제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정보를 충실히 쌓는 아카이빙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어야 하고, 이를 잘 캐내고 분석하여 가치있는 미디어로 변환하는 방법이 널리 확산되어야 하고, 이런 일들을 하는 사람들에게 합당한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 속보와 단독보다는 상보와 발굴에 더 큰 점수를 주어야 한다.

7. 이런 면에서 나는 리터러시의 문제를 ‘잊지 않기’의 문제로 생각할 때 앞으로 우리사회가 해야 할 일들이 좀더 구체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잊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 앞에 놓인 다양한 정보와 매체는 어떻게 반-망각기제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인가? 세계가 끊임없이 지워내고 있는 사람들을, 시간들을 어떻게 우리의 작업기억에 머물게 할 것인가?

#삶을위한리터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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