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매체로서의 텍스트 vs. 영상

1. 학술매체로서의 텍스트의 위상이 쉽게 추락할 것 같지는 않다. 영상과 이미지의 시대가 된다고 해도 지식과 과학의 언어가 시각매체로 대체될 시기는 한참 멀었다. (얼마나 멀었는지는 나도 모름) 아래에서 ‘인용’을 키워드로 삼아 위와 같이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2. 학술글쓰기를 배울 때 인용(citation)은 ‘양념’처럼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문장쓰기, 문단쓰기, 문법 및 구두점 용례, 내용구조 등을 두루 배우고 나서 마지막에 ‘이것도 알면 좋다’는 식으로 던져지는 것이다.

3. 하지만 인용은 학술 커뮤니케이션의 핵심 중 핵심이다. 학술글쓰기는 자기 경험에 기반해 논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연구와 주장에 기반해 자기 논지를 ‘조립’하는 작업이다. 내러티브와는 다르게 학문 공동체가 쌓아온 자산이 글의 바탕이 된다. 동료/선배 학자들이 차려놓은 밥상에 수저 한짝 올리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4. 인용(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텍스트와 영상의 사용패턴은 사뭇 다르다. 학술텍스트는 밑줄그어지고, 요약되고, 재진술(paraphrase)된다. 이것은 차곡차곡 쌓이고 정제되어 나의 글에 새로운 스토리로 자리잡는다. 무엇보다 텍스트는 선형적(linear)이다. 논문 50개를 요약하여 하나의 글로 만든다고 해도 최종 산물은 선형적 텍스트다.

5. 텍스트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책을 꼭 끝까지 읽어야 된다거나 완벽하게 읽어야 된다는 고집하지는 않는다. 책의 서문만 볼 수도 있고, 목차 중에서 흥미로운 장만 읽을 수도 있다. 학술서의 색인을 펼쳐서 흥미로운 키워드를 골라서 볼 수도 있다. 자신의 공부 방향에 따라 특정한 주제, 흐름을 가지고 책을 읽어가면서 지식을 쌓고, 생각의 자리를 마련하면서 일종의 담론 공간(discursive space)을 만들어낸다.

6. 이런 면에서 텍스트는 해체/변형/재조립/재구조화에 매우 적합한 매체다.

7. 하지만 영상의 해체/변형/재조립/재구조화는 여전히 소수 ‘덕후’들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영상편집 기술 습득의 문제라기 보다는 영상매체를 대하는 사람들의 아비투스에 기인한다.

8. 내가 바라는 주제를 가지고 수십 개의 영상에서 필요한 부분만 뽑아 다시 보는 경우가 있을까? 영상 프로듀서가 아니라면 거의 하지 않을 행동이다. 영상을 영상으로 요약하거나, 영상의 특정 부분을 ‘재진술(paraphrase)’하는 영상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9. 이러한 이유로 영상을 재조립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들은 부족하다. 넷플릭스에서 ‘감동받았던 장면들에 북마크를 하고, 이를 모아서 30분짜리 영상으로 만들기’ 기능을 제공하지 않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1) 그렇게 영상을 대하는 사람이 없으니 (2)그렇게 할 수 있는 기능을 굳이 제공하지 않는다. (1)과 (2)는 동전의 양면이 되어서 ‘다시 볼 거면 처음부터 보거나, 시간을 조정해서 찾아봐’라는 명령으로 돌아온다.

10. 또한 영상을 모아 새로운 영상을 만들었을 때 그 영상이 부드럽게(seamlessly) 이어지기 매우 힘들다. 그런 이유로 여러 영상 소스를 기막히게 편집한 몇몇 영상은 열광적인 환호를 받는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런 ‘리믹스’는 수백년 간 텍스트로 이루어져 왔던 관행이다.

11. 학술논문의 ‘리믹스’를 보면서 수십 개의 영상 소스를 기막히게 엮어낸 동영상을 볼 때 만큼의 감동을 받을 수 있는가? 사실 학술적 글쓰기가 겨냥해야 할 지점 중 하나는 ‘모으고-엮고-재조립하고-변형하고-재구조화해서-나온-글’에 대한 경탄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12. 약술한 요인들로 인해 종합, 이론화, 주석, 추상화, 재진술, 재구조화 등을 주요한 과업으로 삼는 학술 커뮤니케이션에서 영상이 텍스트를 쉽게 대체하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13. 과학과 학술담론은 권력이다. ‘텍스트의 시대가 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 권력에 대한 의도적 간과를 낳는다. 영상의 외연이 넓어지고 역할이 다양해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쉽게 텍스트의 몰락을 예견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초안마무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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